[읽기 쉬운 요한계시록강해]#15. 6:9-17. "다섯째 인"

2025. 3. 7. 17:16요한계시록강해

 

오늘 본문은 다섯째와 여섯째 인을 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순교자들의 영혼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공포와 괴로움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이렇게 뒤죽박죽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또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현재의 고난이 사실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제기되는 것입니다. 시편과 예언서를 거쳐 이집트의 이스라엘 자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무언가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부르짖는 긴 전통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2:23). 이 부르짖음, 언제까지입니까? ,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라는 부르지음이 몇백 년간 메아리쳤고, 다섯 번째 봉인을 뗄 때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본문은 특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 망자(亡者)의 현재 지위와 상태에 대해 무언가 명확하게 얘기하는 유일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제단 아래”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전에 제단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요한이 환상을 받고 있는 알현실이 또한 하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점차 발견할 것입니다. 영혼들은 세상이 아직 심판받지도 치유되지도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이끈 악을 포함해 악이 제멋대로 활동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정의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침내 세상이 균형을 회복하고 자신들에게 내려진 가혹한 평결과 선고가 부당했음이 밝혀지는 걸 보기 원하는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6:10-11,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시록에는 숱한 인내의 요청이 있는데 본문 또한 그 중 하나에 속합니다. 본문에서 흰 두루마기을 입는다는 사실이 상상력을 어지럽게 할지 모르지만, 요한은 당연히 여느 때처럼 상징으로 적고 있고, 흰옷은 순결과 승리를 모두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정의가 완결되기 전에 무언가 다른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계시록에서 나중에 발견하듯이, 그 일이 일어날 때에만 새로운 세상이 등장할 것입니다. 곧 그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해 마침내 정의가 시행되고 실현되는 것을 보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제 일어나야 할 무언가 다른 일이 실제로 하나님의 세상 운영 방식에서 핵심인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하는 운영 방식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일어나야 할 일은 아마 악이 최악의 일을 벌이는 것, 그 절정에 도달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현명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마땅히 그렇다고 이미 알고 있던 심판이 무르익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이 가서 약속의 땅을 소유하기 전에 4세대 동안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15:16).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들이 완전히 또 철저히 그래야 할 상태가 될 때까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내용이 합쳐지는 것 같습니다. 먼저 네 기수가 대표하는 악이 더 많은 신자의 순교로 그 절정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지만 순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수단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되듯이, 이것은 실제로 어린 양의 승리가 성사되는 방식일 것입니다. 여섯 째 봉인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나쁜 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새로운 측면을 보여 줍니다.

 6:12-17,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본문에서 우리는 상징에 주의해야 합니다. 고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일식과 지진, 유성 같은 것을 표징과 전조로 여겼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태양빛이 검게 변하고, 달이 피처럼 되고, 또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등의 표현은 대개 이른바 땅을 부스는 사건을 얘기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실제 지진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니고, 강렬한 상징과 은유 외에는 적절한 언어를 찾기 힘든 사건들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늘과 땅이 정말 사라진다면, 이것이 실제로 우주의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종말이라면, 어떻게 부자와 유명 인사가 동굴에 숨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여섯 번째 봉인이 떼어질 때 받은 생생한 계시를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격변이 일어나 고대의 여러 예언자가 묘사했던 장면을 낳은 때라고 보아야 합니다(10:8). 소위 유력자와 선인’, 그리고 그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느닷없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처분에 달렸음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창조주의 시선과 어린 양의 진노의 조합일 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깊은 신비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진노라는 표현은 용어상 모순처럼 들릴 것입니다. 요한이 어린 양의어린양의 관점에서 사자를 보는 법을 배워야 했듯이 어린양의 진노라는 사실로 인해 진노의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정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통해 자기를 내주는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신 분의 진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비난하며 온갖 악의 책임을 그분께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아름다운 세상을 경악할 만큼 망쳐 놓은 모든 것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보좌에서 보는 그분의 시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진노의 혼합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육신하신 사랑의 예수님은 어린 양의 진노 속에서 사랑을 거절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사랑의 요청에 저항하기를 결심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혹시 예수님의 사랑의 요청을 거절하지나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