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3. 16:02ㆍ요한일서,이서, 삼서,유다서강해
오늘 본문은 사랑과 진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며, 진리 안에서 행동하고, 거짓된 교훈에 속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은 사랑의 명령을 상기시키면서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랑‘’ 사랑‘은 대개 ’관용‘’ 관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우리는 다르게 행동하는 다른 사람을 항상 ’사랑‘’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 사랑하지 않는 ‘‘ 것이며 또한 어떤 삶이 유일하게 ’옳은‘ 삶의 방식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그럽지 못하고 ‘,‘, 아주 ’교만하고‘, 아주 ’’ 사랑이 없는 ‘‘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현재의 문화의 주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용‘’ 관용‘에 대한 열의는 어느 정도까지만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관용‘’ 관용‘이란 말의 이면을 보면, ’ 교만하고 ‘,교만하고 ’ 너그럽지 못하고 ‘.‘. 말로는 반대하는 모습만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세계관들이 주장하는 바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은 채,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높은 도덕적 기준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용‘’ 관용‘을 중시하는 현대의 문화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에 날카로운 반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8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한은 시작부터 너그럽지 못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사기꾼, 메시아의 대적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스스로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교회를 세우는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면 겪을 고생은 다 겪고 충분한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처럼 본문에서도 결정적 문제는 “육체로 오신” 메시아 예수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현대 세계에서도 그렇듯 고대 세계에서도 듣기 거북한 말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거나 그에 따라 살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는 요한일서에서 보았듯이, 추상적이고 실제 삶과 관련 없는데도 주장해야 하는 단순한 ’교리적‘ 요점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육체를 입은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몸으로 보여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천이요 모본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희석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관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9~11절,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복음의 위대한 핵심 진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기준선을 정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포용적‘이 되려고 많은 애를 씁니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 또한 우리는 당연히 ’’ 세상 사람들‘을 무례하지 않게 정중히 대해야 한다(고전 5:10, 10:27)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면서, 이러한 핵심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을 환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거리에서 인사도 나누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알게 된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다른 데서 내놓는 전혀 다른 신들을 동시에 예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 기독교적이지 않은 ‘‘ 것인가? 그런 행동은 생명이 아니라 파멸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자비를 보이지 못한 것인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특정한 편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견고한 토대 위에 서 있음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이해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버거울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분별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요한의 대적자들이 가르쳤던 것과 같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만나기를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나름대로 빛에 다가가려 하는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자신은 더 의롭다고 여기며, 마땅한 수위보다 더 엄격하게 선을 그으려는 유혹은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험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 것입니다.
12~13절,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본문에서 나오는 ’종이‘는 파피루스였다고 합니다. 당시 쓰인 서신들은 파피루스에 옮겨져 오늘날 성경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이서와 삼서는 파피루스 한 장에 쓸 수 있는 분량입니다, 요한은 중요한 내용들에 대해 편지로 써 보내었지만 아직도 쓰고 싶은 내용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문안 인사가 생략되었던 요한일서와는 달리 간단하게 문안 인사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나는 사랑과 관용이란 두 단어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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