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3. 12:06ㆍ출애굽기강해
성경을 보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과거형은 구원을 받았다. 현재형은 구원을 받고 있다. 미래형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칭의'는 과거형에 속하고, '성화'는 현재형에 속하고, '영화'는 미래형에 속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칭의'만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일까?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해아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법정적 칭의'로서 신학용어입니다. '법정적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책'을 법적으로 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칭의'로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칭의'는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칭의'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칭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죄책을 사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의'로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거룩한 '의'의 옷을 덧입은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문에 바른 피를 보시고 그들의 죄를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어린 양'에게 전가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월절'은 '칭의'에 속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광야생활은 '성화'에 속하는 것이고, 여기까지는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럼 '영화'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이 최종 목적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급속하게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고 결국에는 앗수루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한다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 자손은 계속 번창하여 전 세계를 다스리는 제국이 되어야 하는데 왜 이스라엘 자손들은 멸망을 했을까? 성경은 참 신비스러운 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말일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혼란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의문을 갖다 보면 어느 날 하나님은 응답을 해주십니다. 내가 보는 책을 통해서 아니면 우연히 들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하여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응답을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항상 질문하는 자세로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성화'의 연속일까? 그러면 구약에서의 '영화'는 무엇일까? 이런 숙제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12: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안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비록 피로 문설주에 발랐다 하더라도 죽음의 천사가 방문한 그 밤에 집밖에 나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보혈의 능력을 믿는 믿음(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피를 보시면 넘어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죄인들에게는 심판을, 어린양의 피로 구별된 자에게는 보호와 생명을 주는 2 중적인 역할을 함을 보여줍니다.
12:24-28에서는 유월절이 거룩한 예식으로 모든 세대에 영원히 지켜져야 할 것과 그 예식에 관한 자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구속의 피로 새 생명을 얻은 구속의 날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영적 생일이며, 자유와 해방의 축제일입니다. 더욱이 이 사건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승화된 복된 날이기에 성도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되어야 하는 소망의 축일입니다.
12:29-30, "바로의 장자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안타까움을 느껴야 할 것일까?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신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다리며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애굽인들 에게는 그런 기다림도 없이 그들의 장자를 다 데리고 가셨습니다. 장자의 죽음과 모리아산에서의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으로 연관을 시키면 본문이 해석이 될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너무 무섭고 잔인한 분이시라고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12: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인들에게 신으로 숭배되어온 바로는 모세에게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죽음은 애굽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던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합니다(7:1)
12:35-36,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이 본문은 3:22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전리품을 얻는 것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서가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백성으로서 출애굽을 시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힘이 들면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곤 했습니다. 가만히 나두었다면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었는데 괜히 출애굽을 시켜서 광야에서 고생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두 정탐꾼 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화'의 과정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과정을 자기의 '의'로 이겨내려고 하면 내면의 자유함을 얻지 못합니다. '성화'의 과정은 말 그대로 2인 삼각의 경주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훈련이고 하나님과 동행을 함으로써 '성화'의 과정을 쉽게 통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화'의 단계에서 미리 '영화'를 맛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에서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천국을 소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영화'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겨서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만이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영화'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를 맛볼 수 있는 자들이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현세에서 천국을 맛보지 않으면 우리는 내세의 천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막연히 노래나 부르고 일도 안 하고 그냥 놀기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생전에 천국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날마다 하나님과 2인 삼각 경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하나님과 2인 삼각 경기를 하면서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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