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9. 11:29ㆍ출애굽기강해
세상 나라는 약육강식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약육강식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고아와 과부는 가부장적인 남성 사회에서 소외되어 외곽 지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항상 외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따라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로, 같은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받기 쉬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법적인 것이 아닌 도덕적 영역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법조문에 포함시켜 그분의 법이 사랑의 법임을 보여주십니다. 게다가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이 따를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선택적인 것이 아닌 필수적 의무임을 분명히 합니다.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려 그들을 학대 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나그네 압제 금지의 법을 베풀면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종살이를 기억시키신 이유는 타국에서 이미 이방인이 되어 겼었던 설움을 먼저 체험한 자들로서 이방인의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랑의 빚을 이방인에게 갚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22:22-24,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집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과부와 고아는 고대 근동에서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보호받지 못하던 연약한 자들을 대표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과부의 경우 그 신분을 나타내는 특수 복장을 착용토록 규정하기까지 하였습니다(창 38:14). 그리고 고아에 대해서는 그들을 학대한 경우 중범죄로 다루어 엄한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신약 시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의무적으로 이들을 도왔습니다(행 6:1-4).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참된 경건과 구제의 표식으로(약 1:27), 이들을 학대하는 것을 가장 잔인한 범죄로 간주하였습니다(시 94:6, 막 12:40).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는 하나님께서 고아나 과부를 학대하는 자에 대하여 반드시 보응하겠다는 강조적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2: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 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본문은 특별히 가난한 자를 위한 보호 규정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사는 날 동안 주위에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신 15:11).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의 각별한 돌보심을 입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가난한 이웃에게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며, 오히려 그들을 도와주라고 가르치십니다(레 25:35-38, 신 15:7). 이 같은 명령은 의식주 문제와 질병 등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가난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부자들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일교차가 커서 해가 진후에는 모포 없이 잠자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가진 것이라고는 한 벌 옷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이 해지기까지 전당 잡힌 그 옷을 찾지 못하면 추위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해지기 전에 그러한 가난한 자들의 옷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온몸을 감싸는 의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그 옷을 밤에는 이불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세밀한 사정까지도 자상히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본다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를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웃을 사랑을 하려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공감'하는 자들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이 구제와 봉사를 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의 구제와 봉사는 다들 자기의 '의'를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하지 않은 구제와 봉사는 다 우리의 '의'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제와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만족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하는 모든 것, 즉, 구제와 봉사, 선교, 심지어는 목회까지도 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나 자신의 욕구와 욕망과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동행이 생명입니다.
이 시간에 나는 과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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