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 20:58ㆍ고린도전서강해
오늘날 서구 유럽에서 코로나 사태에서 많은 확진자가 나온 이유 중 하나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굉장히 중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 유럽은 우리가 알다시피 기독교 문화입니다. 그럼 바울이 복음을 전파한지도 2,000년이 흘렀는데도 무엇을 위해서 '권리'와 '자유' 포기한다는 것이 힘이 드는데 그 당시에 바울이 복음을 위해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라는 메시지는 전혀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만큼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을 운동선수에 비교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매 2 년마다 '이스미안 경기'가 열렸다고 합니다. 이 경기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오직 우승한 자만 상을 받는다는 뜻은 고린도 교인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운동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 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얻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상을 얻기 위해 질주하는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경기에 참가하는 자들은 통상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서 자신을 절제하여야 했습니다. '이스미안 경기'에서 우승한 자에게 월계수나 솔잎을 엮어 만든 화환을 씌워주었습니다. 이처럼 나뭇잎으로 만든 면류관은 경기를 하는 자들에게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쓴 우승자의 영예 역시 덧없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 썩지 않고 죽지 않을 새 몸을 상속받을 사람답게 현재를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운동선수들이 목표와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경기에 임하는 것처럼 바울 자신도 목표와 방향을 확실히 인식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권투선수가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적이 있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몸을 '종'으로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이 논증의 목적지입니다. 고린도의 어떤 사람들이 그토록 열을 올리며 자랑하던 모든 '자유'와 '권리'는 복음 사역의 당위성 앞에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고린도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서구 문화는 자신들의 역사를 자유 신장의 이야기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훈련, 자기 부인, 불가피한 '권리'포기 등을 말하면, '암흑기'나 '중세 시대'로 희귀하는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위해 당신의 권리와 자유를 얼마간 포기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체력 훈련을 받는 것처럼 고되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나 자기 교회가, 권투 링 안에서 헛주먹질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이 자랑하는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몸으로 즉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6:20), 참된 목적지를 향해, 곧 주님과의 연합, 몸의 부활을 위해 몸을 단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13). 그러려면 그리스도인은 '권리'와 '자유'라는 미사여구에 매달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삶의 여정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말합니다. 성화의 과정을 잘 견디기 위해서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말하는 운동선수처럼 호된 훈련과 절제된 생활을 우리 힘으로 하면 굉장히 힘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말씀처럼 살려고 하면 성령님의 역사함으로써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원리인 것입니다. 즉 성경 말씀이 살아서 나의 삶을 움직이는 것을 터득을 하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날마다 영성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성훈련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나의 '권리'나 '자유'를 포기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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