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8. 12:12-20. "여러 지체"

2021. 12. 23. 14:40고린도전서강해

 

 성령의 사역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는 한 가지 목표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몸과 지체의 비유로 언급함으로써 신비로워지고 분쟁이 심했던 고린도 교회에 일치성을 강조하기 위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이 하나라는 것은 통일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은사가 아무리 많이 나누어 있어도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본절에서 세례는 단순히 형식적인 물세례가 아니라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도 다 참여한 성령 세례를 받아 하나가 되고 성령의 지배 아래 사는 자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1절)
 12:14-17,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고린도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은사가 열등하고 중요하지 않으며 좀 더 특별한 은사를 사모하는 교인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들의 우열을 가릴 뿐만 아니라 교인들 사이에도 은사나 능력 등을 비교하면서 사로 자랑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교인들 사이에 서로 분열이 생기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들 때 모두 필요했기 때문에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교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 또한 서로 대립의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몸을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도록 지으셨습니다. 이렇듯 각 지체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에 근거하는 것으로 바울은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완전하므로 각 지체들이 존재하는 자리가 완벽한 것이고 각 지체에게 귀중한 역할이 있음을 본 구절은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누구든 불평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12:19-20,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되는 기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몸 전체를 구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몸은 정상적인 기능을 갖추지 못한 불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는 각기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여 주어진 역활을 잘 수행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올바르고 건강하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2,000년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늘 분쟁이 있었습니다. 많은 교리들이 생겨나고 많은 교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에서 바울이 그렇게나 강조했던 교회는 각각의 은사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유기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왜 교회들은 하나로 통일이 되지 않을까? 그리스도도 한 분이신데 아마도 교회는 죄인들의 집합소라서 그럴 것이라고 어느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은사를 너무 추구하다가 보면 말씀이 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는 교회는 기초가 튼튼한 건물과 같은 것입니다. 모진 풍파가 와도 견디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은사 위주로 가면 그 은사가 성령이 충만할 때는 괜찮은데 성령이 쇠퇴가 될 때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의 은사만 믿고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사 또한 우리들이 말씀이 기초가 되어야만 그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사를 자신의 '의'를 위하여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시대의 성경은 구약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약성경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어쩌면 바울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복음의 점신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을 시키려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을 시키려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밤낮으로 구하여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경 말씀대로 우리들이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천국' 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이 죽어서 어떤 곳으로 가는가를 미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 천국이면 죽어서도 우리들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교회에 분쟁이 심했던 고린도 교인들은 천국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다시 말하면 교회가 가면 천국에 가는 기분일까? '천국'의 개념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적인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묵상을 해봅시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 즉 '천국'에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