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40. 12:27-31상. "은사와 사역"

2022. 2. 7. 21:11고린도전서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12절 이하의 내용을 요약하고 다음절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교회의 일치와 다양성, 상호 의존성 등을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본절은 구체적으로 교회에서 은사와 직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교회)과 동시에 그 지체(각 구성원)입니다. 따라서 몸의 각 지체는 자신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서 교회 전체라고 주장할 수 없고 보잘것없는 부분이라고 해서 교회 구성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은 주목받는 직책에 있는 사람, 혹은 특별한 은사를 받아 대중의 시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서 일부 고린도 사람들을 괴롭히던 교만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참된 교회의 이해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겸손한 섬김의 토대입니다.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이 목록은 로마서 12:6-8이나 에베소서 4:11의 목록과 공통점이 제법 많지만, 전부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기본 자료를 모두 하나로 취합해보면 하나님 백성의 풍성하고 다양한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적 은사를 두 부류로 여깁니다. 먼저 가르침과 관련된 은사들, 그리고 대개 '카리스마적 은사'로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는 데 사용되는 은사들입니다. 만약 은사의 본질이 이렇다면, 사람들에게 은사가 주어진 목적은 은사를 받거나 발휘하는 경험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온전히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은사를 구비하는 데는 어떤 흥분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은사'는 그것을 받은 개인을 통해 온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이 적합하게 여기시는 대로 교회가 서로 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12:29-30, "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본절은 앞서 언급한 직분의 다양성과 상호 의존성을 다시금 분명히 하기 위해 의문형으로 반복하여 묻고 있습니다. 모든 목록에서 '사도'다음에 '선지자'기 나옵니다. 이것은 '가르침과'과는 구별되는데,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선지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아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선지자(예언)의 은사를 성경 교육의 관점으로, 즉 특별한 통찰력으로 새로운 세대에 맞게 성경을 풀어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해 주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이 백성들과 소통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차쯤 교육이나 성경 공부와 무관한 특별히 '영적 선물'로 흘러가서 방언이나 치유처럼 '반자연적'혹은 '초자연적' 역사의 범주로 발전합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교회 안에 특정 개인과 그룹들에게 특정한 말씀을 주시는 활동은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8절 목록에 나오는'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현대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전체로서의 교회는 유연해야 하며, 모든 상황과 모든 장소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형태의 사역을 고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여건에 맞게끔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과학이 발전하고 의학이 발전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는 무엇일까? 병 고침의 은사는 필요성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아마도 바울은 은사의 순서를 정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잘못 정한 순서를 교정해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큰 은사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하고 크게 생각한 방언의 은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소홀이 여기는 가르치는 은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선물은 우리가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사람이 주고 싶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에서는 무엇이 가장 큰 은사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바울시대에는 신약 성경이 완성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 구약 말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복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시대처럼 많은 은사가 필요치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은사들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은사일까?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삶이 아닐까? 그렇게 하려면 성령이 항상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시대에는 성령 충만이 가장 큰 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간에 묵상해봅시다. 나는 성령이 충만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