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8. 21:43ㆍ고린도전서강해
13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입니다. 답답하게 전개된 12장(성령의 은사)과 복잡하게 설명된 14장(방언 문제)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본장은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깊이 있는 기록입니다. 즉 뜨거운 사랑의 불꽃 아래서 어둡고 차갑고 복잡한 모든 문제들은 다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사랑이 고린도 교회 안의 분파 분쟁과 영적 시기심의 혼돈을 바로 잡을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이 편지의 모든 것을 말하는 목적입니다.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헬라어에서 사랑은 4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1, 에로스적인 사랑은 남녀 간의 육욕적인 사랑이며 2, 스토로게적인 사랑은 혈족애를 말합니다. 즉 부모 자식 사이의 피로 얽힌 사랑입니다. 3, 필리아적인 사랑은 친구관계입니다. 4, 아가페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트로게에 의해서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신령한 은사를 받고 미사여구를 쓰는 자라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결국 쓸모없는 자로 전략하고 말 것이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바울은 기독교는 머리의 종교가 아니고 심장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머리로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느끼고 그 느낌이 가는 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바울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바울은 현재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자신들이 살았던 삶에 따라 심판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3:10-15). 그런데 그날에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바울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없이 하는 구제나 봉사 심지어 순교까지도 다 자신의 '의'를 위하여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행위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에서 아무런 점수를 받지 못한다고 바울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게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려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이런 일들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인상적이고 도전적인 언어로 묘사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가지고 있는 15가지 특징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번갈아 가면서 시적인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딥니다"로 끝난 것은 사랑에 있어서는 인내가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랑을 이렇게나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는 사랑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교 종교사상에 물들어 있던 이들에게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 최우선 조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인간들의 의지로 그 사랑을 해야 하는데 인간의 의지로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아가페적인 사랑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만 하면 이런 사랑이 우리들 안에서 샘솟듯이 나올까? 이런 사랑을 하려면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에로스나 스트로게, 필리아적인 사랑은 할 수 있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이 있어야만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이런 사랑을 끊임없이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며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 성령께 이끌리는 삶, 메시아의 몸 안에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내 안에는 어떤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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