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43. 14:1-5. "예배의 우선 순위"

2022. 2. 10. 21:15고린도전서강해

 

 바울은 자신의 개인 영성을 세우는 사람과 공중 예배에서 전체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 사이를 대조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개인 영성을 결코 반대하지 않습니다. 14장의 전체 주제는 공중 예배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은사만 개발하고 과시하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세운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본절은 고린도교인들에게 13장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8:1-2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식에는 "여러분을 우쭐대게"만들고 교만하고 거들먹거리게 만드는 요소가 있지만 사람들을 세우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은 '미래사에 대한 예고'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섬광 같은 영감을 받아서 교훈과 유익을 얻게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예언'은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고린도 공동체에서 여러 은사들 중 예언의 은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방언을 중요시함으로써 은사의 다양성과 그 목적이 왜곡될 위험성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은 좋은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다른 사람에게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 덕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써 신비스러운 것들을 말하기 때문에 알아들으려면 반드시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과 대조하여 예언이 더 우위에 속하는 은사인 이유는 예언하는 자의 말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서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미래에 대해 미리 알고 그것을 사전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와 관련하여 주의 계시를 바르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공동체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입니다. 개인의 재산이지만 나누지 않을 때, 그것은 과시용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공적 자리에서 알 수 없는 단어나 음절을 길고 크게 기도하기를 고집하여 해왔던 일이었습니다. 예언이 방언과 크게 다른 점은 교회를 세우는 데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은사의 본질적 기능을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보고 성령께서 이 기능을 위해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바울의 의도는 방언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방언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방언을 통역한다면 메시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예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방언도 성령의 은사이며, 무의미한 언어가 아님을 보여주고, 잘 사용하면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방언하는 자가 통역의 은사가 없다면 의사소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언이 의미 없는 방언보다 나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언이 방언보다 절대적으로 낫다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에 있어서 그 넓이와 깊이가 더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를 영성에 굶주리게 만들었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온갖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현상, 물질세계 너머에 있는 능력이나 생명의 근원을 간절히 느끼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세계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을 우선 확신으로 이끌기 위해 그런 '초자연적'표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이런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적 때문에 수많은 사이비교주가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을 혼란의 도가니에 빠트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또한 기독교의 역사가 100년 좀 넘었지만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났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의 시작점은 기적과 이적을 체험을 함으로써 출발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 앞서 이것의 성경적인 의미를 먼저 생각해보고 또한 받은 은사가 공동체에 유익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표적과 이적을 보려고 따라 다닌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눈에 보이는 표적과 이적을 추구하다 보면 제자들이 아닌 무리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이 시간에 묵상해봅시다. 나는 받은 은사가 무엇이며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