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44. 14:6-12. "교회에서는 명확하게 말하라"

2022. 2. 14. 21:18고린도전서강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논지는 단순합니다. 교회 안에서 필요한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선한 비전, 연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통찰력을 통해서든 앞서 우리가 언급한 넓은 의미에 '예언', 혹은 단순한 '가르침', 또는 성경 본문이나 기독교적 주제에 대한 일목요연한 해설, 등을 올바르게 전하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방언을 많이 해도 줄 수 없는 유익을 교회에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채로운 비유를 본문에서 사용합니다.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바울은 결론적으로 자신의 경우를 예를 들어 방언에 집착해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방언이 갖는 약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개인적 신비 체험의 요소를 갖고 있는데 본래 이러한 신비주의는 이방 종교의 특성입니다. 기독 교회는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합니다. 교회는 건전한 가르침으로 성도 개인이 거룩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은 서로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어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14: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피리나 거문고는 가장 보편적인 악기 가운데 하나들을 대표합니다. 만약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어떤 곡조를 연주하려는 것인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방언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입장에서, 그것은 무의미한 소음입니다. 이것이 13장 첫머리에서 바울이 했던 말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 알아봅시다. '내가 아무리 많은 방언을 말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을 본절에 비유하면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으로 풀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확한 음정을 내지 못하는 악기가 되어서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14:8-9,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나팔을 부는 것은 군인들로 하여금 여러 임무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각자의 소명이 무엇이든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길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혀가 분명한 말을 하지 않는다면 마치 허공을 치는 권투처럼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9:26).
 14:10-11,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내가 외국어를 모르는데 내 모국어를 제외한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거대한 모임에 참석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면 나란 존재는 그 상황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말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음악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세련되기는 하지만 일반 회중은 부를 수 없는 찬송가를 부른다든지, 세심하게 격식을 갖추고 고상한 어조로 성경을 낭독하여 장엄하고 고귀한 계시로 들리기는 하지만, 진정 삶을 변화시키는 신나는 말씀이 아니라 청중의 일상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들리게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은 허공에 말하는 사람"같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자신의 새로운 은사를 대중 앞에 사용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이 봉착하는 위험은, 함께 모여 교회 공동체 전체를 '세우는'진짜 목적을 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고린도인들이 겉으로 표방하는 만큼 자신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데 열심히라면, 그들이 갈망하고 기도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곧 그들이 조화롭게 협력하여 교회 공동체를 사랑 가운데 세우는 일을 실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진정 인간답고 성숙한 예배가 자리 잡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특정한 영적 선물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사람들과 공동체가 균형을 잃고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 시간에 묵상해봅시다. 나는 나의 은사를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사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영적 은사를 과시하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