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20. 6:39-49. "진정한 순종"

2021. 10. 27. 07:56누가복음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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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찬양과 기도를 할 때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저의 영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잘 알도록 해주소서"라고 기도를 합니다. 영안은 무엇일까? 귀신을 보는 눈일까? 아닙니다. 영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을 아는 눈인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오늘 말씀처럼 장님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제자도를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이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재 교회의 문제점은 "신학의 부재와 실천의 부재"라고 많은 목회자들은 신학은 학교를 졸업하면 끝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평소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고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어려운 약자의 편에서 도움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리고 삶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6:39-40, "맹인이 맹인을 인도 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유대교에서 학생의 교육 목표는 자신을 가르친 선생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본절에서 예수님은 맹인과 선생 등의 용어를 사용하심으로 기독교의 공동체의 지도자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더 높아지면 안 되며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으로 낮아져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지금도  목회자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닮지 않고 가르치심을 따르지 않으면 맹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많은 성도들을 같이 파멸의 길로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기 담임 목사의 신학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영안이 열리지 못하면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풀이 많은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메마른 광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로 가면 양들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끊임없이 영안을 열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6:41-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내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바로 내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데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성경 안에 있는 종이 호랑이로 인식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임임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이 이런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남을 비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맹인인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지도자 밑에 있는 성도들은 참 불쌍한 성도들일 것입니다. 
 6:43-45,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성도들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은 열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면 당연히 우리들을 지배하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아직도 죄악 된 본성이 우리들 안에 성령님과 같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끊임없이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날마다 성경말씀을 상고하면서 그대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맹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맹인이 되면 우리들은 자연히 내 눈의 들보는 생각하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서 나는 향기는 어떤 향기일까를 한 번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6:46-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파괴함이 심하니라"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말씀 따로 삶 따로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무는 다하지 않고 권리만 찾는다고나 할까~ 그러면 의무는 무엇이고? 권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의무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고, 권리는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이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고 사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그냥 그대로 천국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주소만 바뀐다고 목회자들은 설교를 많이 합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을 하고 부르면서 예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액세서리 신앙인이다는 말입니다. 이런 액세서리 신앙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그래도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런 성도들을 주위에서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평소에는 신앙이 참 좋은 것 같았는데 막상 고난이 닥치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을~ 
 예수님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예수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십니다. "행하라고"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무엇일까? 이사야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여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사 1:23). 약자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또한 그들의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참 좋았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강자가 군림하는 세상이 아닌 약자가 보호받는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물같이 흐르는 세상인 것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잘 사는 사람은 괜찮습니다. 가장 힘든 사람들은 하루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자영업자들이나 노동자들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들이 대면 예배를 순교의 정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순교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야 하는 것이지 그런 거 없이 하는 순교는 순전히 자기의 '의'로 하는 순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시면 교회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 시간에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내가 혹시 맹인 지도자는 아닌가~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