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1. 12:06ㆍ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중간을 지나 어떤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예수께 치유를 받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 중에 한 명 만이 돌아와 예수께 감사를 했는데 그는 사마리인이었습니다.
구원(salvation)은 치유와 회복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우리의 인생이 꽃 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개념은 광범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 환자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서 병이 치유가 되었으며 다시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그들의 인생이 다시 꽃 피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명 만이 다시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아홉 명의 문둥병 환자는 구원을 받았는데 왜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본문은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를 통과하고 계실 때의 사건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는 당시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사렘의 순례의 길을 갈 때 부정한 사마리아 지역을 밟지 않으려고 이용했던 우회로를 가리킵니다(1절). 우회로는 두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지역 마을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는 나병환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길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께 멀리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2절).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3절). 나병환자들은 예배와 공동체 생활에서 제외되고 소외된 자들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야 했습니다(레 13:45-46). 구약에서는 나병은 하나님만 고칠 수 있는 불치병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17:14,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제사장은 나병 환자를 진단하고 돌보며 예방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레 13장). 또한 이 병이 치유되었을 때에는 제사장이 우슬초와 함께 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자에게 뿌려 정결 의식을 행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수 기도도 하지 않고 그냥 말씀으로만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열 명의 나병 환자는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치유됨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병이 낫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망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하나님에게 부르짖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몸이 회복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그러나 그들 중 한 명 만이 되돌아와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안이었습니다(15-16절). 이에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7-18). 본절에서 '이방인'의 원어의 뜻은 '다른 나라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사마리아의 사람이 유대인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랬다면 나머지 아홉 명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과 연루가 된 것이 불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적과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자기가 메시아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는 그 당시 당국에서 요주의 인물로 부각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그들이 그렇게나 갈망했던 병이 치유가 되고 나니 자기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오직 본문에서만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이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하나님이 하신일을 믿으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의 '믿음'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뜻 중에는 '치유와 회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된 자에게 다시 너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는 어떤 구원을 말하고 있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 사마리아 사람은 전인적인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살아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죽어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고난이 올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을 받고 그 일이 해결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며 간증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해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우리들에게 알리기 위함이고 그리고 또한 이 고난을 통해 우리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고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열명 중 한 명 만이 똑같은 치유를 받았지만(구원) 한 명 만이 전인적인 구원(영생)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치유를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택하신 것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의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란 말인가? 사마리아 사람은 '믿음과 감사'가 같이 병행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삶이 아닐까? 감사가 있는 마음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이 아닐까~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감사가 항상 우리들에게 있기를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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