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0. 20:20ㆍ누가복음강해
오
오늘 본문 말씀은 13:10부터 시작된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언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면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할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종말적인 사건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알아야지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의 사고는 우주적인 종말에 대한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문맹률이 95%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이큐가 75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주적인 종말을 기대하기를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종말은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 빛을 잃어버렸고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타락을 하고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빛과 소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래미아가 그렇게나 남유다에게 부르짖었던 우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후일을 기약하자는 것처럼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를 하고 돌이키라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고 들어가지 말지어다"(21:20-21). 실제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은 1차 유대전쟁 때 혼란의 틈을 타서 요단강 건너 갈릴리 밑에 있는 헬레라는 조그마한 읍내로 피신을 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의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했다고 교회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기독교는 이방 세계로 전파가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는 종말에 대해 우리가 똑바로 알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내세적인 종교가 되고 맙니다. 죽어서 심판을 받고 천국에 가던지 지옥에 가던지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에 관하여 똑바로 안다면 기독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몸소 실천을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국의 기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교인들이 생각을 했다면 오늘날 이렇게까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누가복음을 계속 해석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리고 경고하십니다(1-2절). 여기서 '작은 자'는 문자적으로는 어린아이를 약하고 사회 공동체에서 무시당하고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을 은유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작은 자는 누구일까?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가나안 성도(교회 나가지 않는 성도)가 백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 모든 책임은 본문 말씀처럼 제자들에게 있다면 바로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잘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3-4절). 예수님이 말한 용서는 무엇일까? 우리들은 이런 용서를 생각합니다. 그래 성경에서 말했으니까 일곱 번은 용서를 해주어야지 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억누릅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한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인애의 마음을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인애의 마음이 우리들에게 '겸손'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겸손해지면 용서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런 것을 지키기가 어려우니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니라"(6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너희에게는 큰 믿음이 아니라 크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라고 표현을 하면 이해하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믿음이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의 크기가 작거나 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과 성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아무리 쥐구멍 한 창문이라도 그 창문으로 우리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의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7-10).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심지어 하나님을 위해 힘들게 일할 때에도, 잠시라도 하나님을 빚진 자 취급하지 말라는 충격적 교훈입니다. 내가 이 일을 다 했고, 내가 이 돈을 다 냈고, 내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이런 나의 태도에 만족하실까? 이런 생각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봉사는 감사에서 우러나와야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사용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나님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죽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리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 예수님은 죄가 없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인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죄가 있다면 우리들을 위한 화목 제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예수님이 진정 우리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자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무언가에 구속을 받고 있다면 예수를 잘 못 믿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자유롭다는 말이 됩니다. 어떻게 자유롭다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면 우리 안에는 용서하는 마음이 생기고 겸손한 마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우리들은 항상 무언가에 구속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면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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