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2. 11:47ㆍ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끈질긴 과부와 세리의 이야기습니다. 본문 말씀을 잘 이해를 하려면 그 당시 재판문화을 알아야 합니다. 고대 유대인의 법정에서는 민사나 형사소송 모든 것을 피해자가 직접 범인을 고소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친척이 살인을 당해도 피해자 가족이 직접 고소를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는 판사가 어느 편을 인정해 줄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당성 인정'(vindication)혹은 '의롭다 선언'(jus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의 뜻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즉 판사가 소송 마지막에 어떤 사람을 두둔하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비유는 여러 면에서 사뭇 다르지만 둘 다 정당성 인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본절을 해석을 하려면 앞장에서의 연장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앞장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와 연장을 하여 본절을 해석을 하면 일상생활에서의 기도보다는 이스라엘의 종말을 앞둔 상황에서의 기도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습니다(2절).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3절). 과부는 소외된 계층입니다. 예수님은 왜 과부를 비유로 들었을까? 그 당시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를 과부로 비유를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여론 주도층은 바리새파 중에서도 강경파인 샴마이 학파였습니다. 바리새파도 두 파가 있습니다. 강경파인 샴마이 학파가 있고 온건파인 헬레 파가 있었습니다. 헬레 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가마리엘입니다. 예수님과 대적하는 바리새파들은 샴마이 학파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5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7절) 이 본문의 비유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이렇듯 부패한 재판관도 일이 성사될 때까지 밤낮 졸라 대는 사람에게 설복당해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정당성을 당연히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송은 어떤 것인가? 이 소송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반대한 이들이 마침내 실패하여 모든것을 잃었을 때 그 분이 정당성을 인정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예수님를 따르는 새로운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앞 장에서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시나리오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했던 도시와 성전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정하셨고 자신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셨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되겠냐고 이야기를 하십니다(8절) 이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 또한 언뜻 보면 종교 행사를 묘사하는 듯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법정 소송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 자랑만 늘어놓다가 세리를 일언지하에 깍아내린 뒤에 자신을 높이며 마루리합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은 세리를 깍아내리는 것일까?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세리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다윗같은 메시야가 와서 힘으로써 로마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작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커다란 마음을 꿰뚫어 보고(17:6) 그분의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바리새인 대신 세리가 정당성을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야기 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 지리라 하시니라"(14절).자기를 낮추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들어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작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시대 정신을 거스리는 것이 신약에서의 '회개'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결국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인 것입니다. 이 '칭의'가 이루어 질려면 우리는 예수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의'기 너무 강하여 예수님을 배척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 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 자신을 갖다 놓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바리새인들이 거룩한 성도들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끓고 나는 죄인이라고 외치는 세리,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목을 곳곳히 세우고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거룩하게 살아왔다고 외치는 바리새인~
우리들은 다들 본인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내면은 어떤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잘 지키고, 구제를 하고 전도를, 하고 십일조를 내고, 목회를 하는 이 모든 것을 세리의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바리새인의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를 하번 점검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바리새인에 가깝나~ 아니면 세리에 가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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