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4. 16:30ㆍ누가복음강해
예수님이 오셔서 병 고침 사역을 하신 것은 본인이 메시아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우리는 이것을 성령 사역이라 하며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이런 사역을 하고 있고 또한 이런 성령 은사를 꿈꾸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또한 감기만 들려도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침과 귀신을 물리치신 것은 '죄 사함', '왕의 귀환' '포로에서 해방'이런 의미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는 병 고침이나 귀신을 물리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야기했습니다. '어린아이는 무른음식을 먹지만(이유식) 장성하면 딱딱한 음식을 먹는다'라고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들이 초신자일 때는 찬양만 하고 기도만 해도 성령이 충만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런 초신자 때의 성령 충만이 없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첫사랑을 회복해야 하다며 또 열심히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첫사랑 회복은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신앙은 생물입니다. 즉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랄수록 거기에 맞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딱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딱딱한 음식은 무엇일까?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쓰인 성경말씀이 살아서 나의 삶을 움직일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하나씩 알아 가는 것이 '영성'인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의 신앙은 바로 이런 '영성'이 주류를 이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치유집회를 한다면서 좁은 공간에 모여서 부르짖고 기도하며 찬양을 하다 보면 코로나만 전염을 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말씀을 대하여 잘못 알고 잘못 전하면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또한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는데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러 가는 것도 모르고 예수님 가시는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면서 찬양을 하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드디어 3년의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권력자들과 로마제국의 관리들과 군사들은 예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이런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마도 제자들은 멘붕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19:30,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고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본절은 스가랴 9:9절의 예언의 성취라 볼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창검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슥 9:10) 평강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가 나귀를 데려가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하십니다(31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초행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고 신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19:35-36,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이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입니다(왕하 9:13)
19:37,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여기에 등장하는 군중들은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동행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부터 동행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벳바게와 베다니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며 찬양하는데 그 찬양은 예수의 모든 기적과 이적을 보았고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예수가 군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공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니 이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본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을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여기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에수님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만약에 군중들이 흥분을 하여 감정을 주체시키지 못하면 이러한 환호가 시위의 양상을 띰으로써 로마 군대와 부딪히게 될 상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드린 찬양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는 신학자가 많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40절)고 하셨습니다. 격언구 형태의 이 구절은 하박국 2:11의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묵살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묵살하시며 자신을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들었을까?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면 이들은 흩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자 전부 도망을 하여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본인들이 믿고 쉽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쓸쓸히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성부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바라보시는 성부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의 자식들이라고 생각을 한 번 해보라~이런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소원을 말하며 들어달라고 애원을 할 수 있을까~우리는 왜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게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이때까지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이것을 똑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사역은 말씀이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독교 영성'인 것입니다. 나는 과연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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