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5. 16:01ㆍ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전 정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당시에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 상징, 이스라엘의 가장 특정적인 실천의 장소,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 중 일부의 주제, 이스라엘의 가장 깊은 질문에 대한 대답,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 중 일부의 주제였습니다.
성전 및 그 의미에 관련헤서 알아보면 첫째, 성전은 이스라엘과 계약하신 하나님의 거소로 여겨졌습니다. 둘째, 성전은 당연히 희생 제사의 장소였습니다. 셋째로, 성전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이 특정한 건물 속에 거하신다면, 그 건물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큰 특권을 얻게 됩니다. 즉 헤롯이 성전을 웅장하게 재건한 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것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적인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성전은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겠다는 야훼의 약속, 야훼께서 백성들의 죄악들, 부정들,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포로생활을 해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을 짓거나 재건하거나 운영하였던 통치자들을 야훼께서 정통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은 왕가 및 왕과 관련된 열망들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이 우신 것은 요한복음 11:35에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울었고 본문에서 울었습니다. 앞절에서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성전을 보고 울었을까?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너'라고 부르는 것은 예루살렘 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이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자기 눈이 가리져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암시를 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전에 수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해 평화의 길을 제공받았고 예수의 활동을 통해 하늘나라의 길을 밝히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눈 안에서 그 길을 숨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평화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력을 통하여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에 가두고 돌 하나로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3-44)하십니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뜻을 잘못 해석하여 파멸의 길로 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알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알고 싶어도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의 환경에 맞게끔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45-46,"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일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이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당시의 제의의 운용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제의 운용을 담당하고 있었던 고위 제사장들은 백성들로부터 폭넓게 미움과 불신을 받고 있었습니다.
성전세가 없었더라면 매일 드리는 주기적 회생 제사들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합당한 돈이 없었다면, 개인 예배자들은 그들의 희생 제물로 사용할 짐승들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없었다면, 희생 제사는 드려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희생 제사가 없었다면, 성전은 자신의 존재 이유 전체를 상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생 제사를 오직 잠깐 동안만 중단시켰다는 사실은 성전의 상징적인 역할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개혁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심판을 상징하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적 희생 제사들이 더 이상드려질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그러한 상황을 얼마나 끔찍하게 바라보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하나님은 시온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좌정하지 않을 것이고,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의 상징 세계 속에서 성전이 차지하고 있던 위치와 기능, 그리고 그 성전의 현재적인 운용을 정당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위는 임박한 파괴에 관한 극적인 상징으로 의도된 것이었고, 이것은 스가랴의 예언의 암묵적인 맥락과 이사야서 및 에례이마서로부터의 인용문들에 의해서 밑받침되며, 탁자를 뒤엎고, 성전을 지름길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의 구체적인 행위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예루살렘 도성 및 성전의 파국을 보여주는 예언적 및 종말론적 상징으로 의도된 것입니다.
19:47-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성전 정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주요 원인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질서를 뒤엎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많은 유대인들은 성전의 운용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성전을 운용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당장 처벌하고 싶지만 이때는 유월절이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이었고 그중에는 열심당 당원도 있었으므로 이들이 민중봉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예수를 바로 처형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후로 이들은 어떻게 예수를 처형을 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해주었지만 정작 본인 울 때는 어느 누구 위로해 줄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을 할 때 울어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의 아픔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했으니 이제 곧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새왕이 되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좋은 자리 한 자리씩 차지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제자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3년을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의 삶을 뒤쫓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것을 알아야 하는가?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신앙의 성숙'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왜 예수님이 우셨는지를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심장으로 내려 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뜨거울 때 그때는 더 이상 예수님이 우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의 심장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뜨거운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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