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72. 20:27-40. "결혼과 부활"

2021. 12. 30. 21:01누가복음강해

 

 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두개파와의 부활 논쟁입니다. 먼저 우리는 유대인들의 부활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원래 구약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부활 신앙이 생겨났을까?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죽자 이집트는 포톨레미왕조가 다스렸고 시리아는 셀루큐즈왕조가 다스렸습니다. 셀루큐주왕조의 안테오쿠스4세인 에피파네스왕이 이집트원정을 갔다가 로마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돌아오던 중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진압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으며 그 후에 에피파네스 왕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뿌리고 할례를 금지하는 등 종교적인 탄압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으며 이런 것을 지켜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순교를 당하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죽은 이들을 부활을 시킬 것이라는 부활 사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리새파가 생겨난 시기는 하스몬 왕조 때이기 때문에 바로 부활 사상이 생기고 난 후입니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부활 사상을 믿었고 사두개파는 원래가 모세오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세오경에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활 사상을 이단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회 기득권이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 사상이 혁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사회가 반란이나 폭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원했습니다. 만약에 폭등이 일어나면 로마가 개입을 하고 그러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이 되려고 하면 로마제국에게 막대한 돈을 바쳐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환전도 하고 제사에 사용할 양을 파는 특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부활을 하지 않았다면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 예수를 메시아라고 인정을 한다는 것은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을 세상 권력자들이 십자가에 처형을 했다는 것은 세상 권력은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 권력이 잘못되었고 예수님이 맞다고 인정을 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2성전 시기에 싹트기 시작한 부활 사상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그 부활 사상이 맞다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 사상이라는 것을 염두고 두고 오늘 본문 말씀을 해석을 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이 예수님에게 일곱형제를 비유를 들면서 부활 때에 그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고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 임이라"(35-36). 부활은 아무나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활하기에 합당한 자들의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암시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천국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시 죽을 수 없다는 말씀은 앞절에서 언급한 부활한 저 세상에서는 결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보존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 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성도들은 더 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의 세계는 현세에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37-38,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본문의 말씀은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리고 야곱은 살아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두개인들이 그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하나님안에 살아 있다는 것을 모세를 통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말씀처럼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신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20: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경쟁적차원에 있었으므로 이 두 파는 항상 마찰을 빚어왔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같은 부활 사상을 이야기한 것에 기뻐한 것입니다. 
 부활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임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본문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은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심장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믿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머리로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은 항상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돈을 많이 벌어볼 수 있을까? 이런 세상적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사상은 '하나님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들은 죽어서도 부활을 하여 영생을 할 수 있다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를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우리들의 심장에는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과연 영적으로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