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3. 20:27ㆍ누가복음강해
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와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41,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가 많은 인간입니다. 즉 '신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고 완전한 신입니다. 여기서 '신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초월적인 분이 아니시고 죄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윗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라는 것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다가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고 완전한 신'이라고 공표를 했습니다.
20:42-43,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네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떼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내 하시니라" 본절은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른 사실을 언급합니다.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여기에서 '원수'는 누구를 이야기를 할까? 예수가 싸우고자 하는 것은 로마제국을 움직이고 있는 사탄입니다. 즉 '악'과 싸우고 있고 결국은 예수는 그 '악'을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예수는 우리들을 통하여 '악'과의 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내 우편에 앉았으라'의 뜻은 예수를 하나님의 옆에 거하시는 초월적인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으로 불렀는데 어떻게 그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보다 훨씬 큰 분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46절)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모든 서기관들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는'서기관들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47절).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서기관들이 율법도 잘 알고 잘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부와 같은 힘없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의 판결권을 남용하여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과 또한 남들에게 자기를 우월하게 보일 목적으로 기도도 길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본문 말씀을 잘 적용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십일조를 내고 주일 성수를 잘 지키면 끝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남의 일처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과부나 어린아이 그리고 이방 나그네들 즉 사회 약자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을 했을까? 에 대하여 크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데려가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도 작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본문 말씀처럼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다윗의 후손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에서 해방을 시키고 그 주변 국가들을 다스리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지엽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들 구원을 너무 작게만 적용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니 세상에서 비판을 받고 있고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보살핀다는데 어느 누가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21:1-2). 천만원을 버는 사람은 십일조로 백만 원을 해도 구백만 원이 남습니다. 이 돈으로 풍족한 삶을 영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만 원 밖에 못 버는 사람은 십일조로 십만을 내고 나면 구십만 원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목회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목회자들은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성도들의 심정을 알려고 하지 않을까?
본절에서 나오는 '렙돈'의 가치는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 은화 한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하는 유대의 화폐로서 최소의 단위였습니다. 당시 성전 규정상 한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렙돈이 성전에서 헌금할 수 있는 최소한 액수였습니다. 그 과부는 그러한 규정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가진것을 다 끌어모아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헌금한 돈은 생활비 전부였다고(21:4)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못 해석을 하면 과부처럼 자기가 가진 것 전부를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작정 부자는 배척하고 가난한 자는 미화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본절을 이해를 하려면 앞절에 나오는 서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연장을 시키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을 봅니다. 가난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헌금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남에게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고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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