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9. 17:26ㆍ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황제에 바치는 세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금 문제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큰 사회 문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주후 6년경에 갈릴리에서 유다라는 자가 세금 문제로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사행 5:37). 이 폭동을 앞절(사행 5:36)에 나오는 드다 때보다 더 많은 국민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요세프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금 문제는 그 당시 큰 이슈가 됨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당국은 예수님이 군중을 자극하여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량하고 경건한 유대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당시 민감한 문제인 세금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는 것을 아나이다"(21절). 이러한 말은 예수가 카이사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대로 기탄없는 대답을 해 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동전에는 엄격한 유대적 관점에서 볼 때, 신성모독적인 형상과 글씨가 씌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쓰인 글귀는 카이사르를 신이라는 견지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의 아들로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에게 질문했던 자들은 이미 그들 자신이 그러한 물건의 소지를 통해서 철저하게 로마에 부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속한 것을 카이사르에게 주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25절). 본절을 흔히 충성을 깔끔하게 구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국가와 교회, 카이사르와 하나님은 미묘한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은 열심 사상에 대한 삐딱하고 빈정대는 평가 또는 직접적인 도전으로 읽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더 미묘하고, 성전, 메시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전체의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의 청중들은 예수가 진정으로 혁명을 지지하고 있다는 모종의 표시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은유적인 대답을 통해어 그에게 제시되었던 양자택일식의 선택을 깨끗하게 거부하고 그 근본적인 대안으로서의 자신의 하나님 나라 과제를 보여주었다고 현재의 주류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 예수는 갈릴리 사람 유다와는 다른 종류의 혁명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로마와의 협력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세금을 바치기를 거부라고 내일은 전쟁을 위한 칼을 가는 그런 유의 직접적인 저항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말씀의 후반 절은 추가적인 양날을 가진 메시지를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전승 전체에 걸쳐서 있는 시편과 예언에 반영되어 있는 한 분 참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달리 말하면 카이사르가 신성모독적으로 스스로에게 돌렸던 신적인 영광을 야훼에게, 그리고 오직 야훼에게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초연한 경건으로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교 사상을 배척하고 다른 그 누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의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동전을 신정 모독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동전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쳐다보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이교 사상에 대한 은유가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교 사상과 야합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예수는 혁명을 향한 탐구를 그러한 야합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그의 진정한 혁명의 길, 진정한 하나님 나라 운동, 카이사르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예배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성전을 민족주의적 야망의 부적으로 오용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회복하도록 권면하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혁명은 세금을 바치지 않고 그로 인해서 야기되는 폭력적 대결을 벌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그 하나님을 닮는 것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을 야훼의 너그러운 사랑을 온 세상에 비추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진정한 혁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을 두 세기 이전의 유다 마카비의 운동이나 이십년 전의 갈릴리 사람 유다의 운동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할 예수 자신의 왕적인 운동을 따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보기에는 야훼와 그의 토라의 이름으로 카이사르를 뒤집어엎으려고 생각했던 혁명가들을 카이사르와 동일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황제의 형상과 '신의 아들'이라는 거짓 칭호를 새긴 동전을 가지고있을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고 그 호칭에 참으로 합당한 사람을 황제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 아마도 그들의 지위를 잃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과 손잡고 싸는 그들은 아주 편안한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애 못박을 수 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십자가는 로마황제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 둘 다에 부합합니다. 로마 황제가 즐겨 사용하던 무기인 십자가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교회와 국가'나 '기독교와 정치 '이론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엔 너무 짧고 함축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항상 이런 문제가 부디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적어도 우선순위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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