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76. 21:34-38. "인자를 기다리라"

2022. 1. 6. 21:19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5절부터 시작한 강론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제까지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청중들에게 애정 어린 권면을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무엇을 조심하라고 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이 잠들지 않도록 조심하여 깨어 있으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맨 정신으로 있어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하물며 술을 취해있다는 것은 영적인 혼탁이 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술 취함은 방탕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활의 염려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 당시 사람은 먹고사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걱정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의 걱정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만큼 자리 잡을 공간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의 종말신앙은 우리가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는 영적 긴장을 늦추지 말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21:35-36,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뜻밖에 이 종말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온다는 말을 합니다. 이 또한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쓰인 말씀임을 우리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는 25-27절에서 언급된 하늘, 땅, 바다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징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하라'는 말은 단순히 그와 같은 무서운 환난 속에서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게끔 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러한 혹독한 혼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이러한 고통의 때를 지혜롭게 잘 극복하라는 의미로 이해함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은 심판대 앞에 서는 것으로 이해하면 문맥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27-28절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그 당시 인자가 도래한다는 것은 다니엘 7장에 근거한 말씀으로 상투적 표현이라고 보면 됩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예수님의 강론의 결론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깨어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모릅니다. 그러면 이 모든 말씀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고 성경을 보지도 않습니다. 설사 본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들에게 윤리도덕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쓰인 말씀이 지금 나에게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은 우리의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술취함과 방탕함으로, 그리고 생활의 염려로 우리가 영적인 침체를 겪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우리의 안테나를 항상 하나님에게 맞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도 예수님은 알고 계시다는 것이 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훈련인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나의 삶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는지를 찾아가는 긴 여행인 것입니다. 설사 나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영성훈련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하니 그냥 주야장천 주님을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옆에서 그냥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다고 생각을 해보면 그러면 외롭지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합부로 행동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성도들 간에 서로 편이 갈라져 싸우는 곳이 많습니다. 만약에 이들이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그런 싸움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목사는 교회는 죄인들의 집합소이기 때문에 늘 싸우고 시끄럽다고 합니다. 신앙은 생물입니다. 즉 자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래된 교회일수록 더 싸움이 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러면 그들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21:37-38,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배경이 됩니다. 그 당시 성전을 담당하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사회기득권에 속한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만약에 사회가 소요가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면 로마군대가 들어오게 되고 그러면 사회가 혼란한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들에게도 돌아오기 때문에, 예수로 인하여 사회적 혼란과 폭동이 일어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본절은 다음 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신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했던 강연의 결론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고난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그 고난은 그냥 고난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들은 앞으로 어떤 고난이 와도 담대하고 용감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일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강하고 담대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강하고 담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항상 깨어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