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1. 12:09ㆍ사도행전강해
본문은 예수님이 1:8절에 말씀하셨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2장에서 예루살렘에, 8장에서 사마리아에 성령이 믿는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가이사랴를 ‘땅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그 메시지가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로마인들에게까지 전해졌다고 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권능의 힘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8)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곳에서는 많은 기적과 이적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또한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 성령의 역사함이 일어났고 지금도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선교지에서는 이런 성령의 역사함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방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전했기에 이런 성령의 역사함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본문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민주주의로 운영하신다거나, 모든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견해 혹은 각 사람이 택한 생활 방식을 다 유효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인종적, 지리적, 문화적, 도덕적 장벽 없이 모두에게 용서와 새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대로 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이 된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10:36-37,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짧은 연설은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하신 설교로 시작됩니다. 그 내용은 단순히 예수님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만 전해진 일반화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었다고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사실을 생략하거나 완화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시지 않는다는 말을 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 말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지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말은 이방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처럼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 메시지를 전했고, 예수님은 유대와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고, 예루살렘에서 사건이 절정에 달했고, 이제 우리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을 이야기하는 이 메시지가 어떻게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효과를 일으켰을까? 그것은 이 메시지 자체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복음’에 대해 말할 때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로 쓰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 예수는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고 말하는 메시지’라는 의미로 썼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 메시지 자체가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은 그 메시지에 사로잡혀 자기 안의 새로운 존재와 능력을 인식하면서 내면에서부터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던 것입니다.
10:38-43까지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는 우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36절). 사람들은 로마에 대항해 무장 반란을 일으키길 바랐는데, 그런 민족주의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폭력에 반대하시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눅 10:5-6), 그런데 성령과 능력으로 하나님이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심으로써 그 메시지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리더십과 왕권에 대한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약속입니다(출 3:12, 수 1:9, 삼상 10:7).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교하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널리 퍼뜨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테네에서 바울이 했던 연설의 핵심 구절과 겹치며 복음의 진리에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말한 것은 “고넬료 당신이 어디에 있든, 또한 이 메시지를 믿는 모든 사람은, 아무 어려움 없이 단번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일원으로 환영을 받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0:45-46,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이나 성령이 유대인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이처럼 이방인들에게도 나타나니 놀랐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새로운 생명의 표지가 여러 가지 기록되어 있는데 ‘방언’은 그중 하나일 뿐이며 언제나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날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할례 받은 남자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할례 받지 않은 이 사람들도 성령의 임재와 음성으로 채울 만한 그릇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10:48)고 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전하는 사람이나 복음을 받는 사람 모두 성령의 역사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항상 성령 충만함을 갈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기도제목이 우리들의 생사화복이 아니라 성령 충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나의 기도 내용은 무엇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도행전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8. 11:19-30. "안디옥에 뿌리내리다" (0) | 2022.04.27 |
---|---|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7. 11:1-18. "논쟁과 변호" (0) | 2022.04.25 |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5. 10:17-33. "베드로가 고넬료에 가다" (0) | 2022.04.19 |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4. 10:1-16. "베드로의 환상" (0) | 2022.04.13 |
[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33 9:32-43. "베드로의 이야기" (0) | 2022.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