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42. 13:1-12. "사명과 마술"

2022. 5. 10. 17:01사도행전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교회가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해서 언어와 풍습이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1차 전도여행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용을 보면 오늘날 선교사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이 최초의 선교사들도 다 똑같이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무당과 영적인 대결을 해서 이기기도 하지만 또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고 그러는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복음을 들으려고 하는 부흥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도화선이 되어서 지금까지 교회는 전 세계에 지속적으로 선교사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지중해 섬에 있는 구브로 출신의 사람들과 먼 북아프리카 구레네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서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13:1-3까지 누가는 안디옥교회를 거창하게 소개합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중이었고, 바나바와 사울을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도 유명했습니다. 그들의 일상적 경건 생활은 주님께 예배드리고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께서 새로운 지시를 내리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성령의 지시가 바나바와 사울을 다른 곳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13:4-5,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성령께서 키프로스 섬을 그들의 첫 목적지로 지정하셨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는 바나바가 그 섬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곳이 첫 방문지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미 그곳은 일부에게 복음이 전해진 곳이라고(11:19)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그 섬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의 핵심부, 즉,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전도프로그램에서 하나의 패턴입니다. 먼저 유대인 공동체에 전하고 이어서 이방인 공동체의 핵심부에 전할 예정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6에서 복음에 대해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는 행동을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13:6-7,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바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로마 총독과 그 지역 마술사를 만납니다. 누가는 로마인 총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만 도리어 유대인 마술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로마 관리에 대해서 편협한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가가 이 책을 쓰면서 로마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그들에 대한 편견이 없으며, 모든 관리가 특히 모든 로마인이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존재 자체로 위험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음을 모두가 알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고 그 결과 그가 메시지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출발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 세력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엘루마라고 알려진 유대인 거짓 예언자 바예수가 사도들이 하는 말을 듣지 말라고 총독을 설득하려 하자 본격적 대립구도가 생기는 것을 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본문에서 처음으로 바울이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히브리 이름이고, 이스라엘 첫 왕의 이름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비유대인 사회에서는 ‘사울’이라는 이름이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의 그리스어 형태인 ‘사울로스’는 여자처럼 걷거나 해동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쓰는 형용사였습니다. 그런 이름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어서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리스 사회로 진출하는 많은 유대인들처럼 일반적 그리스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 이름이 ‘바울’인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그 마술사에게 일시적 맹인의 상태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10-11절에서 선포합니다.

 13: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총독이 “주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말한 것은 복음의 메시지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이 전달하는 능력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나는 곳곳에서는 이적과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사도행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면 이적과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도 우리들에게는 이런 이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이적과 기적인 것입니다. 그냥 예수를 믿는다고 말로 시인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그런 신앙인 된다는 것이 이적이고 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총독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은 바로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성경 말씀이 나의 삶을 움직인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나를 움직일 때 이것이 바로 우리들에게는 이적이요 기적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이적과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