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갈라디아서강해]#11. 3:15-22. "율법의 역할"

2024. 1. 11. 10:42갈라디아서강해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전 세계적인 한 가족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 가족은 출생이나 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믿음의 관점에서 규정된 하나의 그룹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과 15장을 근거로 앞의 6~9절에서 바울이 선포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논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15-16,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바울은 본문에서 사람의 언약을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신실성과 견고성,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언약을 무효로 만드시거나 덧붙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그와 그 자손들에게 주신 것인데, 그 자손은 바로 오직 한 사람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한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나 의도하신바 메시아 안으로 편입된 한 가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담긴 뜻이었고, 이는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것도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교적 늦게 무대에 등장한 율법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17-18,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율법이 생기기 전에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430년 후에 생긴 율법에 의해 무효가 되거나 약속이 취소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의 말썽꾼들이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는가에 대해 바울은 말하고자 합니다.

 3:19-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약속과 그 성취 사이를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류 전체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아주 분명히 밝힙니다(롬 3:23). 또한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해 인류는 물론이고 온 우주의 문제를 해결할 처방을 찾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점도 분명히 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가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중간자 역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천사의 중개를 통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중재자’ 모세를 통해서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늘 원하셨던 '한‘ 가족을 탄생시키는 중재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롬 3:29-30) 그분은 여러 가족이 아니라 한 가족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그대로 방치하면 적어도 두 가족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민족과 그렇지 못한 이방민족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하나님의 의도일 수 없다고 본문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바울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관계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육신의 가족들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다른 인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죄인이었고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롬 6:23). 만약 율법의 규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미 2:21에서 말했듯이,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런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의미 있고 유익하지만, 아브라함의 가족을 포함해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이 마침내 약속을 성취하신 그때까지, 이런 역할을 하면서 제자리를 충실히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신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예수의 신실하심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약속이 성취되었는데, 이는 한 민족 집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이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바울의 논증은 로마서 3:21-26에서 말하는 내용과 아주 유사합니다. 즉, 지금까지 하나님은 믿음의 표지를 지닌 전 세계적인 가족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이제 메시아 안에서 이 가족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인들은 메시아요 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가족의 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온전한 자격을 얻기 위해 더 갖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할례는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할례를 하려고 할까? 할례는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할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어떤 할례를 하고자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