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후서강해]#28. 11:1-6. "그리스도의 신부"

2024. 6. 13. 10:40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앞장에서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으로 삼은 바울은 이제 거짓 사도들과 교사들을 용납한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강한 어조로 책망함과 동시에 거짓 사도들의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 본장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야훼의 신부로 보는 성경의 주제를 채택하여 바울은 다른 곳에서처럼(7:4, 5:23-33), 교회가 메시아의 신부라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신부가 다른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고 바울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11: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앞의 10장에서 바울은 교만에 가득 찬 거짓 사도들이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신랄하게 공격했는데 본문에서는 모순되게도 자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자랑과 거짓말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참된 사도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적자들이 사용했던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참아주리라 믿었고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참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11:2-3,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성경은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20:5)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질투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에 몰래 들어온 거짓 사도들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에서는 딸의 결혼에 있어서 최종적이 결정을 내리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12:14, 고전 4:15)이 고린고 교회를 한 남편인 그리스도의 신부로 정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혼인을 예를 든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충실하고 순결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여 그 남편을 떠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상에서 잘 알려진 단골 주제를 끌어오고 있습니다. 곧 창세기 3장의 유혹과 반역입니다. 그는 로마서 5:12-217:9-11에서처럼 다른 곳에서 이 주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아담을 죄로 인해 온갖 문제를 야기한 인물로 부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비유를 사용하여, 그는 오직 하와만, 그리고 뱀이 하와를 꾀어 금지된 열매를 따 먹게 한 속임수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두 번째 타락의 위험에 대해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5:17에서 말했던, 결국 전체 복음의 핵심에 있는 새로운 창조’(6:15) 이후 새로운 타락이 뒤를 잇고 다시 혼돈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바울이 떠난 이후 고린도로 왔던 교사들은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영성과 예배 관행을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다른 영과 다른 복음, 본질적으로 다른 예수를 제시하고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일까? 일부 신학자들은 이 장들이 바울이 처음 여섯 장에서 반대하던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의 교사들을 겨냥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전혀 새로운 몇몇 교사들이 고린도에 등장하여 갈라디아의 경쟁 교사들이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교회를 꾀어 내려 애쓰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편지 전반부와 동일한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더 좋은 해석일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판이하게 다른 사람, 다른 예수에 대해 이야기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세기에 예수란 이름을 가진 유대인 남자가 숱하게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본디오 빌라도 통치시기에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출신의 교사 말고 다른 누군가를 지칭했을 가능성은 무척 낮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것과 판이하게 다른 영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대의 종교 세계에서 많은 영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교사들은 아마 그때까지 교회 안에서 역사해 왔던 것과 동일한 영의 감동을 받았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3-8에서 간추린 것과 공통점이 전혀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에 대해 유창하게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열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수, 그들의 성령, 그들의 복음과 진짜배기 사이에는 미묘하면서도 대단히 중대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분이십니다. 진짜 성령은 세상의 고통 속에서 탄식하는 분이십니다(8:18-27). 진짜 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에 온 교사들은 이렇듯 힘겹고 험난한 복음의 칼날을 슬그머니 무디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주장하는 그런 복음은 그들의 사회적, 문화적 열망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은 웅변적 기교 면에서 그다지 효과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런 복음은 그들이 희망하는 명성과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들에 고린도 교인들이 현혹되었다고 바울은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1:5-6,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도착을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그가 바보 무식쟁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족한 인물임을 폭로하겠다고 벼르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대면, 그와 더불어 교회의 일반 회중, 사이에 있을지 모른 혼란은 바울이 도착해서 보고 싶은 상황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부로써의 지위를 항상 명심하라고 권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의 지위를 잘 누리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