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고린도후서강해]#36. 13:11-13. "마지막 인사"

2024. 6. 25. 16:06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바울의 편지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공식 기도문이나 축복문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골자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우리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께 확고히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알찬 실제적 의미와 알찬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고, 그것들이 하나로 엮어져 격조 높은 기도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인사와 격려하고 권면하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임을 확증하는 법칙이요, 성화를 실천하는 원리이며, 자신을 성찰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11-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니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제시하는 교훈은 대단히 버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너무나 철저하고 값비싼 마음과 삶, 공동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어둠을 뚫고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다시 말해 첫 창조와 새 창조의 하나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찬란한 빛을 비추셔서, 왕이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신다고 말했습니다(4:6). 일단 그 빛이 성도들 주변의 세상을 밝히기 시작하여, 성도들은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면(5:16), 선택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지막 당부와 인사의 말인 것입니다.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은혜와 더불어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모습인 이유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더없이 과분한 자비로 우리에게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복음에서 누누이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특히 8장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사랑 가운데 값없이 행하신 일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 하시는 일도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이 8:9에서 언급했던 것입니다. 너그럽게 헌금하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당부하면서, 바울은 풍요로운 하늘의 실존을 뒤로하고 우리를 위해 가난하고 겸손해지기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본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그럽고 헌신적인 하나님이 예수님이 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가 온전히 은혜되기 위해,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주기 위해, 은혜가 해야 했던 일이 그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바울이 하듯이 우리는 이 은혜가 우리들의 삶에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능력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단 그분의 성품에서 한 가지 특성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의 핵심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앙 고백은 고대나 현대의 다른 대부분의 신관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은 분명할 것입니다. 고대 이교 세계는 분명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남신과 여신 가운데 일부는 특정 사람들에게 사랑 비슷한 것을 보여 주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변덕스럽고, 고약하여 진정시키고 달래야만 하는 초인간적 세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불안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심오한 본성이 사랑이신 한 분 하나님을 언급하는 종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가 희망을 붙들었던 것을 기독교는 마침내 성취되었다고 선언한 신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만드신 한 분 하나님이 정말 철저하게 사랑의 하나님이고 그분은 스스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세상 속에서 역사하여 마침내 만물을 바로잡음으로써 이 사랑을 입증할 것이라는 신념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초대교회는 새로운 형태의 영성,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품는 것과 비슷한 친밀한 신뢰, 자신들이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따스한 안정감이 자신들을 감싸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에 담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붙들린 이들, 주 예수의 은혜가 핏줄에 흐르는 이들은 이로써 서로 연결되어 세상이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한 가족을 이룬 것입니다. 이것은 혈연적, 종족적 혈통이나 관계에 전혀 기반을 두지 않은 가족입니다. 그 안에서는 누구든 모두 환영받습니다. 이는 공동 생활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가족이고,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 코이노니아는 친밀한 사귐뿐만 아니라 동반자 관계’, ‘협력’, ‘공유’, ‘연합’, 혹은 교환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과 관계 개선을 위해 애쓰는 동안 이 코이노니아는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자신과 삶과 고린도 교인들의 삶 둘 다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바울이 믿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놓아줄 수 없었고,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설립할 수 없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마케도니아 교회와 누리는 행복한 관계에 그냥 젖어 있을 수만도 없었으며, 도리어 그는 만사를 철저히 검토하여 동반자 관계, 참여, 사귐이 온전히 표현되도록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완벽한 그림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