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15. 4:21-25. "등잔대 위의 등불"

2023. 7. 7. 11:29마가복음강해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내용이 한 데 어우러진 일종의 삽화 형식의 메시지로서 예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내용들입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본문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이루고 있으며(눅 8:16-18), 마태복음은 산상 수훈을 근간으로 본문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접한 자의 책임성입니다. 즉 빛을 받은 자는 그 빛을 타인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ㅊ4:21-22,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나 등경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사람들은 밤이 되면 등잔에 등불을 켜서 가져옵니다, 그리고 나서 사방이 잘 보이는 등경 위에 등잔을 올려놓아 온 방이 환하게 합니다. 기껏 등불을 켜서 말 통 아래 두거나 평상 아래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등불을 밝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기름일 것입니다. 만약에 기름이 떨어지면 더 이상 등불은 불을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름은 무엇일까? 바로 말씀일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바뀌고 그 바뀐 삶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게 만들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 삶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등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질 때는 아직 환하게 비추는 등불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 마음속이 조금씩 밝아질 뿐입니다. 단지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죄의 지양성'이라고 합니다. 즉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그리스도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안에는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만 해도 우리 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빛을 온 사방으로 비추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본문 말씀은 약속인 동시에 경고성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비밀리에 이 말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라 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곧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라는 약속과 “지금 똑똑히 들어라, 너희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4:23-2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본문은 온갖 종류의 예술 작품의 소재로 쓰인 말씀입니다. 정의의 의미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희곡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도 그중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는 수준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서 얻는 혜택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투자할 만큼 얻는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노력한 만큼 돌려받는다는 식의 해석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약속과 경고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짧은 말씀으로 그 약속과 경고의 의미는 확대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고 더 깊이 파고든다면 그들은 더 많이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무리처럼 피상적 수준에 머문다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새 일을 하신다는 인식마저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서구 유럽의 신앙이 쇠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18세기의 계몽주의 때 생겨난 ‘이신론’때문이라고 보는 신학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뒤에는 직접 피조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학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8:9절 말했듯이 성령하나님이 우리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에 관여를 하신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고,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신론에 심취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은 그냥 성경 안에 존재하는 관념적인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고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죄에 대한 ‘지양성’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죄는 단지 각자의 도덕성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서구 사회가 신앙을 잃어가고 있고 사회는 각종 범죄와 폭력으로 물들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이 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진짜 이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들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 영이 있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등불을 밝혀주는 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내 안에 기름이 충만하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