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4. 1:21-34. "축귀와 치유"

2023. 6. 21. 14:59마가복음강해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유명해지셨으며 어떻게 그분의 공생애가 그러한 극적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축귀사역과 치유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권위 있는 말씀만 전했다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렇게나 따라다녔을까? 그 당시 의술이 그렇게나 발달하지도 않았고 특히나 예루살렘을 벗어난 지역들은 의료혜택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당연히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지배층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입니다.

 1:21-22,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못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가버나움은 신약에서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지만 구약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예수님 일행이 1년 반 동안 갈릴리 전도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회당의 기원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 당시 회당은 460~480개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회당은 예배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겔 11:16), 교육과 재판(마 10:17)의 세 가지 기능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설교는 율법교사 만이 할 수 있었지만, 회당장이 허락하면 나그네들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초기 사역에서 각처에 있는 회당에서 안식일 설교를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눅 4:16).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 하는 설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암송하거나 과거 랍비들의 교훈을 인용할 뿐(마 15:2-3), 은혜롭거나 새로운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권위 있게 전하셨던 것입니다. 즉 유대교 전통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바리새인 같은 일반적인 선생들은 “모세가 말하기를”, 혹은 “어떤 랍비가 말하기를”이라고 했던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지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다가 그 당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들을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1:23-24,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은 정신분열증 환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병 걸린 사람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인생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악몽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이상한 세력에 인격이 완전히 사로잡힌 듯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 아는 듯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꾸짖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25-26절).

 1:27-28,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이들이 놀란 것은 예수님이 단 한 번의 명령에 귀신이 즉시 쫓겨나간 사실로 인한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이때까지 율법학자들의 설교와는 다른 신박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낫게 하시니 예수님의 소문이 갈릴리 온 사방으로 퍼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1: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원래 베드로의 고향은 벳새다(요 1:44)였고, 베드로는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하였으며, 전도 여행 때에는 부부가 함께 다녔다(고전 9:5)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주 손을 대어 병자를 고치셨는데(마 8:3, 눅 5:13),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이 손을 대시는 것으로써 역사하신다는 것과, 따뜻한 사람의 체온을 동시에 나타냄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일행을 섬길 정도로 몸이 완전히 나은 상태라는 것을 마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에서도 환자가 금방 회복이 되어서 서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한마디로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고 있다고 마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랍비들은 여자가 식탁에서 수종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것 또한 개의치 않으셨다고 마가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혁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계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오늘날 교회에 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1:32-34,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끝나므로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온 것입니다. 안식일날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사건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알았고, 그분이 자신들을 단번에 영원히 패배시키려고 오셨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악을 쓸 수 있지만, 갈보리 사건 이후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증언과 구원 행위의 핵심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자주 공포와 절망에 빠질 수 있지만 이미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사랑의 권위로 이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강하고 담대하게 세상에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강하고 담대히 세상을 도전하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