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111. 26:26-35. "최후의 만찬"

2023. 1. 6. 14:48마태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마지막 만찬 이야기입니다. 그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식사입니다. 유월절식사에서는 출애굽이라는 그 위대한 사건을 상징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한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즉 어린양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이 그것입니다(출 12:7-8). 그리고 가장은 식사 메뉴에 대해 설명하고 또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건넜고 그럼으로써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서 자유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또한 그 유월절 마지막 식사에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식사의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십니다.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의 여러 종파가 생겨난 것도 이 성찬식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화학적으로 변하다고 주장하는 ‘화채설’을, 루터의 ‘공재설’, 칼빈의 ‘성령 임재설’, 그리고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주장하면서 이 성찬식으로 인해 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밤의 그 방의 분위기 속으로 한 번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마음일까? 아마도 예루살렘을 입성을 할 때 호산나를 외치며 자신들의 겉옷을 예수님이 타신 나귀 발아래에 깔아 들였던 그 흥분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 모습은 200 년 전 유다 마카비가 시리아 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성을 입성하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유다 마카비처럼 이방 세력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이교세력에서 구할 메시아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살과 피를 먹으라”라고,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유월절을 매우 새로운 방향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셨고, 그러한 관점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26: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지금 최후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앞으로 유월절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만찬은 영원한 죄에서 해방되는 영적인 유월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최후의 만찬은 새 언약 시대에서 성찬 예식으로 계속 지켜지는데(고전 11:23-26),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만찬은 최후의 만찬인 동시에 최초의 성찬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매우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천 년 넘게 유대인들이 지켜온 축일을 하나의 사건으로 요약하고 계십니다. 예전부터 유대인들은 원래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오래전에 약속하신 일을 마침내 행하실 새로운 출애굽 사건을 가리킨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이 세상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하실 거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행동은 인자가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내어줄 거라고 하신 말씀(20:28)과 동등한 상징 언어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곧 죽음으로 찢길 자신의 몸, 그리고 곧 십자가에 쏟으실 자신의 피와 동일시하신 행동,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먹고 그 안에서 죄 용서, 새 생명을 받고 새 창조에 참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의 요점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6:34-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본문 때문에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는 수탉이 음산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우리는 예수님을 옳게 믿고 거듭난 백성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동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그 첫 징조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궁핍한 존재인지 베드로처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새로운 자아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자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시간 나는 진정으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