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118. 27:27-38. "십자가 처형"

2023. 1. 20. 15:19마태복음강해

 

오늘 본문은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처형을 당하시는 내용입니다. 마태는 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는 첫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의 조롱을 받으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우선 우리들은 로마 군인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멀리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왔을 것이며 이곳에서 유대 반란자들과의 전투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전우들이나 친구들이나 고향 사람들을 잃었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또 다른 유대 혁명가의 지도자를 대하는 태도가 좋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27:28-31,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군인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혔는데 아마도 예수님의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그런 옷을 입힌 것 같습니다. 마가(15:17)는 자색 옷이라고 말하는 데, 이런 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군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으로 만든 왕관을 씌우고 그 당시 동전에 새겨진 로마황제의 손에 쥐어진 통치권의 상징인 홀을 모방하여 예수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마치 가이사 황제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27:32-33, “나가다가 시몬이라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예수님은 전날 밤에 잠도 못 자고 채찍질도 많이 당하셔서 십자가의 들보를 지고 갈 힘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세로는 세워놓고 가로만 죄인이 지고 갔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법적 권한을 사용해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막 15:21)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당시에 성 서쪽 벽 바로 바깥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한 이후로 성의 경계가 확장이 되어서, 예수님의 처형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성묘 교회는 현재 성벽 안쪽에 있다고 합니다. 골고다의 말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의 “해골”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처형된 사람의 해골이 많았거나 지형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쓸개 탄 포도주는 쓴맛이나 독성이 진정제나 마취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부유한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사형수들이 고통을 덜 느끼게 하거나 의식을 잃도록 하기 위해 아편이나 마취제를 포도주에 타서 주는 자선행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정신으로 십자가에 올라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27:37-38, “그 머리 위에 있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그 당시 죄수들은 유죄 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죄명을 머리 위에 붙였는데, 예수님의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었지만 마태에게는 엄연한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 옆에 있는 죄수들은 사기꾼이나 강도들이 아닌 혁명가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이 쓰인 당시는 1차 유대전쟁이 끝난 뒤였기 때문에 로마당국에 의해 출판물에 대한 검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들에게 강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군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형제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20:23), 한 사람은 자기 우편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자기 좌편에 두고 즉위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이 왕좌가 바로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때부터 말씀하신 나라는 결코 군사력으로 세우고 지키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수단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되신 하나님이 선택하신 수단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을 적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병사들에게 뺨을 맞으시지만, 저주의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5:39), 그들은 예수님의 속옷과 겉옷을 다 벗깁니다(5:40), 그리고 군인들은 강제로 자신들의 짐을 지울 수 있는 로마법 상의 ‘권리’(5:41)를 행사합니다. 다만 여기서 그들의 짐은 예수님이 매달리실 무거운 십자가 기둥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요점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말씀하신 길을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 되는 길, 이 세상의 빛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5:14).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이 세상의 어두운 구석들에 비추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아지 까지도 증오와 폭력, 그리고 전쟁으로 세상을 얼룩지게 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또한 예수님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회복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대처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행해졌다는 것에 우리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흠모해야 할까?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도 그 길을 따르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고자 노력은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