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9. 11:01ㆍ마태복음강해
십자가는 원래 정치적 상징이었는데,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지닌 권력의 궁극적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이곳 주인이다. 우리의 길을 막는 사람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사형법은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수형, 참수형, 그리고 십자가형이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끔찍하여 로마 시민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은 주로 반란군들에게 적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정치범인 것입니다. 온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자랑하던 팍스로마는 이렇게 십자가 위에 건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관할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27:11-12,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면서 죄목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신성 모독 죄로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자신이 신이라고 했다고 해서 신성 모독죄로 처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죄목을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빌라도 입장에서는 문제를 일으키는 거짓 예언자는 얼마든지 매로 다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을 자처하는 사람은 정치적 문제를 의미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찾아서 체포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메시아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혐의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예루살렘 감옥에는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었습니다(15절).
27:17-18,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그 당시 유대의 명절에는 죄인을 풀어주는 특사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월절기간이기 때문에 죄인을 풀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빌라도도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빌라도의 아내를 등장시키면서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27: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이 심각한 잘못임을 직감하고는 빌라도에게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그는 무죄”라고 아내는 말하지만 빌라도는 듣지 않습니다.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님은 무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에 빌라도는 자신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27:23-25,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할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빌라도가 손을 씻었다는 것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손을 씻는 것은 피 흘림 앞에서 유대인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신 21:1-9). 아무리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다고 해도 그의 죄책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라고 한 말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출 20:5, 삼하 1:16). 이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은 70년에 치러진 1차 유대전쟁과 135년에 발 코크바에 의해 2차 유대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로마로 포로로 끌려갔고 그리고 온 세상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을 접하는 첫 독자들 역시 1차 유대 전쟁이 끝난 후였기 때문에 그 참혹한 결과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던 것입니다(26절).
바라바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그 강도가 풀려났다는 것은, 죄인인 우리가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월절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마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만약에 그 당시 흔한 민중 선동가였다면, 즉 또 한 사람의 바라바였다면, 서로 바꾼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이 세상의 인간들의 권세와 제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서로 공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십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행적은 죄와 죽음의 홍해를 가르면서 바라바와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에게 그곳을 지나 자유를 얻으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예수님의 초대에 잘 부응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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