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빌레몬서강해]#2. 8-14절. "나의 심복"

2025. 2. 12. 11:47나의 일상

 

오늘 본문은 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정중하면서도 간절하게 그리고 권위 있게 그를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오네시모가 비록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낮은 신분의 노예였지만 영적으로는 그의 주인 빌레몬과 자신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노예 제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할 태도를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8-9,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바울은 지금 빌레몬을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 안에서하는 설득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조작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공정하지 못한 억압으로잘못 표현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복음에 대한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진실한 사랑으로 무엇을 설명하는 것과, 그 복음에 기초하여 마음을 정한 다른 사람 사이에는 미묘하고 까다로운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결국 사랑은 그렇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난을 두려워하여 설득하거나 격려하거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무엇을 보여 주는 시도를 화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자유로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접촉이 전혀 없는 운둔가가 되는 ‘자유’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유라는 가짜 우상을 세우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온갖 사랑, 설득, 인간의 상호작용을 차단하여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그런 자유일 것입니다.

 바울 또한 빌레몬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게 오네시모의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바울이 굳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하게말할 수 있다고 기독교적 신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요청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 그는 빌레몬이 동의하며 그대로 행할 것을 합리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자신과 빌레몬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설교자와 회심자 관계였을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이후에 분명해질 터인데(19), 빌레몬은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상한 권위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는 복음 전도가가 되게 하셨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 세계의 주요 지역들 곳곳에 예수님께 충성하는 공동체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는 만일의 경우에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위와 신분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문제를 깊이 숙고하여 스스로 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간청은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자신의 나이가 들었고 감옥에 있다고 쓰며 빌레몬의 사랑과 동정과 애정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울의 나이는 아마도 50대 초반일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나이가 많지 않지만 평균 수명이 낮았던 그 당시에서는 자연스럽게 빌레몬에게 존경을 요구할 수 있는 연장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요청은 이제 확대됩니다. 그와 빌레몬이 사랑과 동역자 관계와 애정과 존경이라는 몇 가닥의 실로 묶여 있다면 이제 그와 오네시모가 동일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10-12,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오네시모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가르침과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 4:14, 4:19). 처음으로 자녀들을 넓은 세계로 보내는 걱정 많은 부모처럼, 바울은 오네시모를 골로새로 보낼 때 자신의 마음(심복)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빌레몬이 도망간 자신의 노예 오네시모를 다시 볼 때, 바울은 그가 그곳에 서 있는 오네시모만 보지 말고 바울 자신을 보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13-14,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바울은 오네시모로 하여금 자신을 돕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빌레몬의 동의나 찬성이 없으면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이 많음을 내세우지도 않고 빌레몬의 승낙을 받으려는 겸손함으로 보여 줌으로써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할 화해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 내면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8:9). 그러므로 우리가 상대방과 화해를 할 수 있으려면 우리 내면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할 기도 제목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빌래몬 또한 아무리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과연 진정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 이 시간 나는 과연 남과 진정으로 화해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충만한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