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빌레몬서강해]#1. 1-7절. "믿음의 교제"

2025. 2. 11. 11:34나의 일상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더불어 빌레몬서는 옥중서신으로 불립니다. 골로새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고 부자였던 빌레몬과 그의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에 관한 일과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적인 편지인 것입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바울의 공손, 사랑, 겸손, 성스럽고 사심 없는 성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내륙 쪽으로 대략 150킬로미터 들어간 골로새에서 살았고, 골로새서도 동시에 그곳에 전달되었습니다(4:9). 빌레몬은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시에 바울은 골로새에는 가지 않고 에베소에 머물며 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당시 문화를 알아야 본서를 이해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당시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랬듯이 빌레몬도 종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은 오늘날 사회에서 자동차나 TV를 소유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존재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노예 제도가 혐오스럽지만 그들에게 노에 제도는 전기나 가스 혹은 자동차 같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종 없는 사회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노예 제도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자동차와 비행기를 포함하여 휘발유를 사용하는 모든 운송 수단과 모든 전기기구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 만큼 현실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종 가운데 하나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친 것입니다. 당시 세계에서 그것은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범죄였으며, 많은 주인들이 탈주에 대해 혹독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의 이름의 뜻은 유용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 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인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친구요 형제가 되었고, 복음 안에서 친밀한 동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는 다 같은 동역자며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며 처벌 없이 그를 다시 받아들여 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해 주라는 암시도 할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요청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통용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바울은 지금 시대 조류를 거스러는 것을 빌레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빌레몬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정 회개를 하고 가치관이 바뀌었다면 바울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3,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바울은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빌레몬에게 간청하기 전에 정중한 문안 인사로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안 주인으로서 노예를 관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빌레몬의 집은 자신의 가족과 종들이나 복음을 받아들인 가까운 이웃들에게 집회장소로 제공된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한 동역자는 이 서신 전체의 핵심이며, 바울은 이를 최대한 이용합니다. 사실, 그가 동역에 사용한 단어는 종종 교제로 번역되지만, ‘교제라는 단어는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따뜻한 애정에 더하여, 바울과 빌레몬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사업적 동역자 관계와 비슷한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일이 진전되려면 함께 충성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레몬은 바울의 동역자란 표현에 여러 가지 감정이 섞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미묘한 감정일 것입니다.

 6-7,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바울은 자신과 빌레몬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동역자 관계가 열매 맺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함께 사업을 하고 있고, 따라서 충성스러운 동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믿음의 교제의 동역인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복음을 믿을 때 복음 믿는 다른 모든 사람과 그런 동역자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동역은 강력한 효과를 낼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복음 사역을 함께 하면 새로운 일,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는 모든 동역자들이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동역함으로써 평안함으로 얻고 기쁨과 위로를 받을 수있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그렇게 역사할 때,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에 새로운 것들, 선한 것들, 새로운 삶의 방식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이 새로운 것들이 우리를 왕께 이끈다”. 이것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일 테지만 바울이 의도하는 바의 핵심인 것입니다. 왕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통해 그분이 가족이 될 때, 그들은 그분의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표지는 그들이 성장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한 인류를 서로 분리하는 온갖 전통적 장벽들을 부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 4:12-13에서, “왕의 몸을 세우는 것왕의 충만하심이라는 기준에 따라...성숙하여함께 자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몸이 온전해지려면, 모든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분 안으로함께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부류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주인과 종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아무 편견도 없이 모든 부류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