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요한계시록강해]#23. 11:1-14.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2025. 3. 19. 16:35요한계시록강해

 

오늘 본문은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이 울리기 전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증언과 그들의 사명,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난해한 책들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책일 것입니다. 그 난해한 성경 중에서도 계시록은 가장 난해한 책으로 간주합니다. 또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계시록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요한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한 가지 측면에서 본문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요한은 성전을 측량하라는 명령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두 증인이 등장해 중요하고 진기한 행동을 하다 살해당해 묻혔다가 그 뒤에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늘로 높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무슨 의미일까?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본문에서 에스겔 40장과 스가랴 2장에서 예언자의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는 요한의 성전 측량은 예루살렘 성전 혹은 4장과 5장의 하늘 성전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저술하던 시기에, 즉 기독교 운동 아주 초기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참 성전, 즉 하나님이 지금 능력 많으신 영을 통해 살고 계신 장소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 공동체에 표시를 남겨, 7장에서처럼 궁극적 해()에서 보호받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바깥마당이라는 용어로 표현된 공동체가 위험에 노출될 것이라는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인 일곱의 절반이 본문에서는 42개월 즉 7년의 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 측량이 하나님이 와서 거하실 곳을 표시하는 한 방법이었듯이, 요한이 사람 성전의 공동체에 표시를 남기는 것은 자신의 임재로 이 백성을 영예롭게 하고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엄숙한 뜻을 알리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11:3-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본문에서 두 증인은 예언자적 증언, 신실한 죽음,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정당성을 인정받는 증인 온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보입니다. 교회 전체는 1:20에서처럼 촛대로 상징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두 증인인가? 부분적으로 요한은 두 가지 중요한 성경 이야기에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이교도 왕 바로에게 맞서서, 우리가 이미 8장과 9장에서 본 반복된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한 모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들째, 이교화에 앞장선 이스라엘왕 아합에게 맞서서, 기도의 결실로 가뭄을 가져왔고 그 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한 엘리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의 의도는 모세와 엘리야가 문자적으로 땅으로 돌아와 11장의 내용을 실행할 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예언자적 증언이 모세와 엘리야의 위대한 전통 속에서 능력의 표적을 행하고 이로써 주변 불신자들을 괴롭게 하겠지만, 그들의 사역의 절정은 무저갱에서 올라온 괴물“(7)의 손에 의한 순교적 죽음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괴물‘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큰 도성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이후의 여러 장에서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해 줄 것인데, 거기서 우리는 당시 로마에 의해 구현된 이교도 제국의 권력이 ’괴물‘이고, 로마 자신 혹은 어쩌면 이 경우 친 로마 제국의 공적 세계가 ’도성‘일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겠다고 마음먹은 내용은 이것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신실한 예언적 증언을 담당하라는 사명을 주셨고 우리를 보호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고난과 죽음을 모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이 고난과 죽음 자체가 교회가 경배하고 따르는 예수님의 그것처럼 궁극적 예언자의 표징이 되어, 세상이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13).

 그러면 이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삼 일 반 후“(11)에 세상은 교회에 대한 승리를 기뻐할 것입니다(삼일 반은 일곱의 반으로 상징적 숫자이다). 하지만 돌연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이 죽은 시신들 속으로 들어가는 에스겔 37장의 환상이 실현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는 다니엘 7장의 환상도 실현될 것입니다. 교회의 순교 이후 이루어지는 교회의 정당성 입증은 예언자의 증언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이것을 지켜보던 세상이 마침내 회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 마지막의 강렬한 표현의 의미일 것입니다. 계시록을 비롯한 다른 성경책의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두려워 떨며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일시적이거나 마지못한 인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참회하며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재앙이 실패한 그곳에서 교회의 순교적 증언이 성공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열방이 와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가장 난해한 내용 중 하나인 오늘 본문은 요한이 이 책을 쓰고 있는 교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핵심 진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어런양은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셨고, 그분이 그렇게 하시자 온갖 종류의 두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팔 소리가 울렸다. 온갖 공포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제 두루마리는 요한에게 건네졌고, 요한은 성전을 측량하는 상징적 행동과 두 증인의 비유적 이야기를 통해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4장과 5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13절 상징의 강력한 효과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을 때 그곳에서 의인 열 명만 찾았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셨을 것입니다(18:32). 하지만 이제 악한 도성의 10분의 1만 무너지고 10분의 9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을 때, 이교도 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77천 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7천 명만 죽고 대다수 사람들은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들 즉 회심한 자들이란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진정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회심한 자인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