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3. 11:53ㆍ요한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시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사건이 예수님이 마지막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는 공생애 막바지에 일어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공생애 초기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성인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마지막 여행에서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고,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짧은 공생애동안 여러 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하십니다. 또 예수님이 초기에 이런 일을 하셨다면, 이것은 몇 가지 일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조사한 이유(막 3:22, 7:21). 또 대제사장이 마침내 행동할 때가 되었다고 결정했을 때, 이미 그분을 고발할 구실을 잡았다고 느낀 이유(요 11:47-53)등입니다. 그러면 저자 요한은 본문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저자는 앞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종살이에서의 해방과 자유, 구출을 경축하는 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예수님이 성전에서 하신 일이 그분이 유월절에 부여하시는 새로운 의미의 단서가 된다는 것을 독자들이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을 내쫒으시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십니다(14-16). 이 사건은 예수님이 성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단서입니다. 우리는 우선 성전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전은 유대교의 고동치는 심장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오늘날 대형교회 정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예배와 음악, 정치와 사회, 민족의 경축과 탄식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 어디보다 짐승이 많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전이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살기로 약속하신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곳은 민족의 구심점이요, 또한 민족 생활의 구심점이었던 곳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성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주요한 단서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성전이 부패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상거래, 시장 바닥 같은 분위기는 성전에 있어야 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하니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고 대답하십니다.
2:20-21,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유대인에게는 성전이 무너졌다가 재건되는 것과 관련된 오랜 전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고, 일부에서는 이 일이 다시 재현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헤롯 대왕은 성전 재건 사업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지금 헤롯 대왕의 아들 하나가 그 사업을 완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전승들을 수용하여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리들이 표적을 요구하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22-23,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그럼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세 번이나 같이 보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동안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많은 표적을 행한 것 같습니다(3:2). 사람들은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믿지 않고 신기한 표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마치 돌부리에 뿌려진 씨와 같이 잠시 믿음의 싹이 나오는 것 같지만 금방 시들어버리고 만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13:1-9). 이런 사람들은 입술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참된 고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6:66, 8:31-59). 즉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이끌리는 것 같지만 삶의 변화와 온전한 헌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24-25,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시는 것이 전능성이라고 한다면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전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렘 17:10, 21:12). 이미 베드로와 나다나엘을 통하여 입증되었지만 요한은 다시 한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2장에 나오는 두 가지의 사건은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를 간추려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신뢰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만을 믿었던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표적을 갈구하고 있고 그 표적을 행하는 사역자들에게 열광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왜 사람들은 표적을 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표적을 찾아다니는 것은 말씀의 능력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 또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수많은 표적과 이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처형당할 때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이상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전이신 예수님,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즉 보이는 표적을 통한 믿음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말씀을 통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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