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9. 20:43ㆍ고린도전서강해
이 당시는 교회라는 건물이 없고 개인 가옥에서 예배가 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회합할 만큼 큰 집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성찬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유한 가정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 관습에는 부자들은 덜 유복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서 자긍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나아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하기 일쑤였습니다. 자신과 절친한 친구들은 귀빈용 방에서 최고급 음식과 포도주를 먹으면서, 다른 방이나 옆방에는 질이 낮은 음식과 술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앞 단락에서 남성과 여성이 예배시에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을 고린도 교인들이 하고 있어 이에 대해서 질책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입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그런 차별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차별은 메시아 안에서 교회의 하나 됨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야 하는 바로 그 예식을 훼손할 만큼 위험 수위에 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앞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이 전한 말씀을 잘 지킨 것에 대해 칭찬했었지만 여기에서는 칭찬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예찬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임이 분파를 이루어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주님의 만찬에 경건치 못하게 참여함으로써 유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1: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본절에서 말하는 분쟁은 당파심(1:10이하)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성찬을 둘러싼 혼란을 의미합니다.
11: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본절은 바울이 풍자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에 분쟁이 있어야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즉,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구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도 구원받아서 구원의 열매가 나타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1:20-21,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본절은 오늘날 교회에서 성찬을 중심 예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언 문서입니다. 이는 복음서보다 바울의 서신이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주의 만찬'은 정규 식사를 하다가 그 중간에, 특정 빵 조각과 특정 포도주 잔을 놓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을 선언했습니다. 고린도의 문제는 이 정규 식사가 교회 안에 번진 계층 분열의 표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 밤에(행 2:7) 함께 모여 각자 준비해 온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고 그 후에 떡을 떼고 잔을 나눔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을 가졌습니다 이때 특히 부자들은 식사를 여유 있게 준비해 가지고 와서 가난한 사람들에 나눠주었기 때문에 예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부자는 가지고 간 음식을 배불리 먹고 또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 취하기까지 했지만 늦게 온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들은 변변치 못한 식사를 하거나 심지어 굶는 일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헬라나 로마 사회의 일반 회식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바울은 이런 행동이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회합을 단순히 이익 행사로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한 데 모인 하나님 백성을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영적(더불어 사회적)이권을 증진하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행동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 일뿐 아니라, 의도적이든 아니든, 실제로 그들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욕망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나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물 같이 흐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과부나 어린아이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했는데 이들에게서는 이런 것이 나타나지 않기에 바울은 지금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배 터지도록 먹으라고'
'믿음'은 무엇일까? 창세기 12장에 있는 아브라함을 22장에서 그렇게 아끼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수준으로 이끄러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박영선 목사님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앙은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 역시 복음을 받아들인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교 신앙에 물들어 있었고 그 당시 관습이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써 구별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바울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러나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면 우리는 사역 자체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하나님의 도구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지금의 교회와 별반 다름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열심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은 이들도 장성한 분량의 성도로서 성장시키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간에 묵상해봅시다. 나의 믿음은 어떤가를~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열심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수준까지 이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7. 12:1-11. "같은 영의 일" (0) | 2021.12.14 |
---|---|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6. 11:23-34. "몸을 분간하라" (0) | 2021.12.13 |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4. 11:2-16. "교회 예배에서 남성과 여성" (0) | 2021.12.08 |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3. 10:23-11: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0) | 2021.12.07 |
[읽기 쉬운 고린도전서강해]#32. 10:14-22.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 (0) | 2021.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