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3. 1:39-56. "마리아의 찬가"

2021. 9. 30. 21:37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내용적인 면에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집니다. 즉, 시편의 인용구로 여겨지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역사서(삼상 27:8), 선지서(합 3:18)등의 내용도 암시됩니다. 이는 마리아가 구약 성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졌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마리아의 찬가에는 억눌린 자들을 옹호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권세 있는 자를 파하며,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시는 내용 등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 가히 혁명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내용 면에서 구약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삼상 2:1-10)와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점은 마리아가 한나의 노래를 참조하였거나, 누가가 한나의 노래를 자신의 필체로 인용하였다는 비판적인 주장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사점은 유대인들의 교육제도에 기인한 것입니다. 즉 한나든 마리아든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성경 교육을 철저하게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그 형식과 내용이 유사한 찬양을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찬양에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마리아 자신의 영광에 대한 인식이 두드려졌다는 것입니다.

 1:39-40,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성경은 마리아의 여행길이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여행했는지, 누구와 함께 찾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령으로 임신한 두 여인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이를 수태하지 못하다가 늙은 나이에 아이를 수태한 여자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수태한 여자의 만남은 무언가 부조함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1:41-42,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임신 6개월에 복중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순간의 태동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랜 산 중 생활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중 마리아를 만난 데서 온 기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는 사실에 대한 감동, 그리고 성령의 계시 등에 의한 복합적 감정의 표시로서 엘리사벳은 탄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마리아 또한 자기와 같은 성령으로 임신한 사실을 알았으니 얼마나 기쁠까요~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마리아 자신에게서 일어난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벳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이 낳을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자신의 아이에게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는 어떤 사람인가를 데오빌로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혁명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연약한 처녀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이 이렇게나 힘이 있고 역동적을 수가 있는지~

 1:51-55,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본절은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 어머니가 독립투사 아들에게 거사를 앞두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장엄하고 역동적입니다. 이런 고백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고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1: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성령은 석달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론을 해보면 아마도 석 달 동안 마리아는 훌륭한 태교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도래할 메시아와 그 메시아를 인도할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에서도 성령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 복음서인 것입니다. 물론 성령 세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공부를 해보면 성령이 충만한 시대에는 그만큼 갈급함이 있었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또한 그 시대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갈급함이 많이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평양 대부흥운동이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에 회개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주 금요일에 모여서 회개기도를 도시마다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회개기도는 우리의 잡음죄에 대하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의 회개는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 일어나는 기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을 하려면 우리들의 죄에 대한 회개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의 단계인 하나님과의 깊은 동행이 이루어져야 회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만 하는 걸까요? 바로 마리아가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찬양을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에 대하여 찬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시간에 깊게 생각을 해봅시다. 내가 하나님에게 찬양을 하면서 너무 기뻐서 울어본적이 언제였는가를~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