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4. 1:57-80. "사가랴의 찬양"

2021. 10. 1. 17:24누가복음강해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의 탄생과 사가랴의 찬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이후 페르시아, 알렉산더,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500년 가까이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후에 팔레스타인은 셀루쿠즈 왕조가 다스렸습니다. bc 2 세기경에 쓰여진 마카비 2서에 보면 셀루쿠즈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레스왕의 폭정은 극에 달했습니다.  에피파레스왕이 이집트 원정을 갔다가 로마의 간섭으로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올 때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에피파레스왕이 무려 8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놓게 하고 돼지고기를 먹게 하는 등 종교에 대한 핍박도 극에 달했습니다. 이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 신앙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렇게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죽은 후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부활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구약에서는 부활신앙이 없었는데 중간기에 부활 신앙이 생겨났을까요? 이것을 신학용어로 '게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시절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한"(응어리)가 맺혔다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있는 '한'은 어느 도화선으로 인해 폭발력이 있는 에너지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한'이 메시아를 갈망하는 것이었습니다.

 1:59-60,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려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 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 당시에는 생후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때에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짓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라고 한 것은 사가랴의 필답을 통해서 계시의 내용을 전해 받았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62-63,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펀을 달라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당시 사가랴는 귀도 들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가랴가 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면 엘리사벳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1: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한 번 생각해보세요 십 개월 동안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다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500 년간 하나님에게 말씀을 듣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1: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여기서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고 초자연적인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입니다.

 1: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본절은 태어난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이 섞인 물음입니다.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드디어 500 년간 침묵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가랴를 통하여 예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 개월 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사가랴가 말을 했으니 얼마나 시원했을까요~ 본절을 읽는 당시의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몇 년의 가뭄에 메마른 대지에 비를 적시는 기분이었을 것 입 니다.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속에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으면 좀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1: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으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 하시며"구약에서의 구속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뿔은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과 왕권(단 7:23)을 상징하는 것이니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 다윗'은 오실 메시아를 암시하는 글입니다.

 1:76-77,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게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알게 하리니"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이 말씀은 이사야 40:3, 말라기 3:1 말씀의 성취입니다. 여기서는 우리는 구원의 선제조건이 죄사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회개와 함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후에 그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3:3).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혹자는 요한이 사해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엣세네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엣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아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엣세네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개인 구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하여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자처했습니다. 아마도 광야에서 있었다는 것은 제사장의 아들로서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그 당시 성전은 타락을 했기 때문에 누가는 의도적으로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고 했는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인 현재는 성경을 통하여 그 시절의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의 시대도 굉장히 답답한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평양대부흥 이후 성령의 역사함이 사라진 시대인 것 같습니다. 작금의 코로나의 시대에는 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혼란의 시대일수록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여 사가랴의 찬가처럼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그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10 개월 동안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다가 드디어 말문이 열린 사가랴의 심정으로 돌아가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