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5. 21:41ㆍ누가복음강해
예수 탄생은 사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 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두 기록 간에는 내용과 관점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 탄생과 관련하여 동방 박사의 경배(마 2:1-2), 헤롯의 유아 학살(마 2:13-8)등을 언급함으로써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로부터 배척당하였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누가는 가축우리에서 탄생하신 예수(1-7), 천사들의 찬송(8-14), 목자들의 경배(15-20)를 다룸으로써 예수께서 비록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근본적으로는 천사들과 인간들로부터 경배받기에 합당한 메시아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 권세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팍스 로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로마제국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힘으로 이루어진 평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힘을 사용하여 한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권세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평화는 힘없는 과부나 고아 이방인들도 핍박을 받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이루어지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평화인 것입니다. 즉 세상 나라는 피라미드 구조하면 하나님 나라는 평등한 구조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해석하기가 좋을 것입니다.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이 당시 로마는 14 년마다 팍스 로마와 세금 징수를 위하여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이사 아구스도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사람인데 공화정 말기 지도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 아들입니다. 그런데 율리우스가 자칭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런 율리우스는 정적들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아누스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치고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인 들이나 피정복지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를 '신의 아들'로 불렀습니다. 또한 황제는 대제사장직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예수님과 겹쳐지는 분위기입니다. 누가가 아우구스투스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가 '신의 아들'이 아니고 이제 탄생한 예수님이 진정한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그 당시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사항만을 기록하는 방법인데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 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 명령이 로마의 명려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누가는 예수가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 초라한 시골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2:7,"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첫아들'을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합니다. '구유'에서 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즉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계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 아무 데도 머리 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에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합니다(눅 9:58). 그리고 그 당시 구유는 갓난아기를 누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합니다.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의 직업은 아주 천시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목자들이 하는 일은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살펴 볼 때 복음은 맨 먼저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런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2:9-10,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허노라" 목자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사가랴에게 나타난 천사가 목자들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목자들은 아사셀 양들을 키우는 목자이기 때문에 신앙심이 좋아서 천사가 나타났다고 주장을 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주권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을 통하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이 목자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리스도의 탄생인 것입니다. 곧 예수가 '복음'인 것입니다. 또한 로마시대에는 황제의 취임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가 취임을 할 때에는 일반 백성들이 평소에 먹지 못하는 특별한 음식을 배급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2:15-16,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장면을 연상시킵니다(1:39). 목자들이 양 떼를 누구에게 맡겼는지 아니면 그냥 두고 왔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습니다.
2:17-19,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에 축하사절단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이 아이를 낳으면 많은 축하사절단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한 축하사절단이 왔습니다. 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누가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힘없고 억눌린 자들을 위한 나리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어떤한가요? 전부 성공지향적입니다. 모두들 큰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설교 또한 성공지향적인 고지론입니다. 고지를 점령해서 세상을 다스리자는 것입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 말씀에 왜 목자들을 예수님 탄생에 축하사절단으로 등장을 시켰을까요?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르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구약의 예언서에는 하나님은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라들이 진정으로 열심히 지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서 힘없는 약자들을 강탈하고 자기들의 영광과 부를 위하여 하나님에게 바치는 제사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위배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도 똑같습니다. 좋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나만 잘되면 되지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되지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십일조 많이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자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을 실까요?
우리는 '영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코로나 시대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무엇일까요 한 번 생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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