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55. 15:25-32. "탕자의 비유:아버지와 큰 아들"

2021. 12. 13. 07:55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돌아온 탕자에 대한 큰 아들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원했던 포로에서의 해방은 무력으로써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력으로 로마에게 대항을 하면 예루살렘은 멸망한다고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이 아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다스라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있는 나라라는 것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복음에 항상 바리새인들과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여론 주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의 주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들이 생각하기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세리들과 창녀들과 그리고 장애를 가진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의 교제가 불만인 것입니다. 그 당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이런 예수님은 사회 근간을 무너뜨리는 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오길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힘 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메시아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유대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결말이 없습니다. 그 결말을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결말을 찾아봅시다.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여기서 '맏아들'은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사죄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자칭 타칭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밭에서 일한 것은 자기의 재산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온 것입니다. 이런 맏아들이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으니 종에게 무슨일인가 물어봅니다(26절). 그 종은 동생이 돌아왔어 아버지가 잔치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27). 이에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따집니다(28절).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엽소 새끼라고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기서 섬긴다는 헬라어의 뜻은 상전에 대한 종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보다는 율법의 수많은 조항들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의를 이루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이라는 뜻이됩니다. 본문에서 "염소 새끼라도 주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공의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선하고 옳은 사람이며 동생은 정죄받아 마땅한 악인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15, "아버지가 이르되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2/3를 상속박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집의 가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출 4:22) 구원에 있어서 우선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사 61:6) 이방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의무와 권리를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5:32,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우리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라는 것을 제발 깨달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편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의 이 비유는 몇몇 다른 비유들처럼 에수님의 직접적 사역 현장을 넘어서서 초대교회를 지향합니다.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유대인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런 사실을 축하하기가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교회에서도 보이지 않는 파벌은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신앙생활이 다릅니다. 특히나 자기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열심하고 하고 교회일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성령의 은혜로 열심히 교회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성도들을 무시하고 폄하합니다. 누가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가 존재하는 한 이런 다툼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역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성도들을 잘 통합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통합을 할 것인가? 참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그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일 떼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사역자의 역할이 아닐까~ 
 사역자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성도들의 삶을 바꿀수 있을까? 그렇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먼저 수 천년 전에 쓰인 성경 말씀이 살아서 자기의 삶을 움직이는 역사함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만난 경험이 없으면서 성도들에게 성경 말씀에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를 하라고 하면 성도들이 받아들일까?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3,000년 전에 그리고 2,000년 전에 쓰여진 성경 말씀이 살아서 꿈틀대며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해보았는지를~ 만약에 아직도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지금이라고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