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12. 21:43ㆍ누가복음강해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희생제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이사야 53:10). 예수님은 대속죄일이 아닌 유월절에 희생제물로 택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속에서 단 한 번의 해방의 순간이었고, 지금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시작시킬 단 한 번의 순간을 바뀔 바로 그 절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메시아로서 성전을 회복시킬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회복은 메시아의 과제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앞서 예수님의 사역 기간 동안에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현장에서 죄 사함을 부여함으로써 예수님은 성전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해야 할 것은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싸워야 할 싸움은 진정한 원수인 고소(고발)하는 자, 즉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동시대인들이 메시아가 싸울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것, 거의 같은 시기에 메시아를 자처하던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싸움을 싸우고자 열심이었던 바로 그 싸움을 부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의 배후에 있는 어둠의 세력들에 대항하는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 전체에 걸쳐서, 특히 질병 및 귀신들림과 싸울 때에 바로 이 싸움을 싸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기를 체포하러 왔을 때 "지금이 너희의 때 곧 어둠의 권세의 때니라"(22:53)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 자체를 사탄의 거주지로 여겼던 것입니다. 특히 가야바라는 골리앗을 대항하여 다윗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다른 쪽 뺨을 돌려 대고 십리를 더 감을 통해서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 왔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로마의 채찍질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병사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욕과 위협을 하는 말들을 내뱉는 대신에, 묵묵히 고난을 받거나 용서의 말들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순교자 전승 속에서 초기 기독교 전체에 걸쳐서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이런 생각을 제자들이 처음부터 알았다면 과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 그 당시 메시아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숭배하고 섬기던 사람들 또한 메시아와 함께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와 함께 했던 사람들 또한 약 400명이 로마 군인들에 손에 무참히 처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은 죽어도 제자들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하지 않도록 원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죽었다면 기독교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22:42,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담담히 예고를 하셨는데 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혹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나를 확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혹시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면 어쩌나 하는~혹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처럼, 이제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셔서 내가 굳이 이 일을 겪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땀이 핏덩어리같이 되어 떨어졌다는 누가의 상세한 의학적 설명은 현대 연구에서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극단적 스트레스와 공포 환경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심정을 공감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두려움과 아픔을~
22:46,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험'은 무엇일까? 가깝게는 예수님이 체포된 이후에 일어날 재판에 뜻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예수님과 이스라엘, 온 세상에 다가오고 있는 더 큰 '시험'의 축소판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나라, 그 분이 전한 평화 메시지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그들의 공격은 경비병의 칼이나 몽둥이와 똑같이 핵심을 놓쳤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낫게 하지 않았다면(51절). 제자들은 예수와 같이 잡혀가서 고문을 받고 처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역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22: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그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 세상 역사가 엄청난 공포와 어둠의 순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의 순간으로 진입하리라고 믿으셨습니다. 또 그 반대쪽에서 그들을 구원할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할 거라고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험'이자 '큰 시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혈혈단신으로 그 어둠과 공포 속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과 세상의 운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우리들은 그냥 머리로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제자들이 자기와 함께 죽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시려는 예수님, 우리는 공생애 때에 에수님을 자꾸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아픔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고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또한 죽음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처럼 흘리도록 간절히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악의 소굴로 들어가셨는데, 이런 예수님을 무슨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시간에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심정, 공포와 두려움, 불안,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 이런 마음을 몸속 깊이 느낀적인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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