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1. 23:1-12.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선 예수"

2022. 1. 17. 21:01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빌라도와 헤롯 앞에서 심문을 받는 내용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를 끌고 빌라도에게 가서 고발을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4절). 그러면 빌라도는 왜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이야기를 했을까? 빌라도는 가이사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온 것은 지금이 유월절 기간이기 때문에 혹시나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은 정복지에서 일어나는 소요사태에 민감하게 대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보기에는 예수가 그렇게 위험한 인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메시아의 개념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개념입니다. 즉 왕인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다윗왕처럼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서 승리를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자칭 메시아라는 사람들은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무력으로 로마 당국에 도전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은 무기로 무장하지도 않고 폭력적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그렇게 위험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23: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본절에서 무리들은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 즉 산헤드린 공회원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그렇게까지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을까? 정치적으로는 빌라도가 보았을 때 죄가 없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적이 아니면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과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성전 정화 작업이 그들에게 예수를 죽이려는 도화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성전을 부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성전, 그리고 그 성전을 통하여 또 다른 지배세력이 된 부패한 무리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한 것입니다. 또한 본절에서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이란 것을 강조한 것은 유다와 드다등(행 5:36-37) 갈릴리에서 무력 혁명이 일어났던 곳으로 갈릴리는 열심당의 본거지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6-12절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란 것을 알고 갈릴리를 지배하고 있던 헤롯에게 보냅니다(6-7절).
 23: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생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사복음서 중에 누가복음만이 헤롯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기간에 예수를 죽이려 했다고 말합니다(13:31), 그리고 이번에도 누가만 유일하게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불안정한 현직 '유대인의 왕'이 미래의 진짜 왕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헤롯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과 마술의 달인을 합친 인물쯤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실망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않고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출애굽 지도자가 모세처럼 하나님의 심판으로 헤롯을 겁주거나 이적을 보여줌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리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어느 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종류의 예언자나 왕이 아니시다. 누가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참 예언자이고 참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런 진짜 왕권과 나머지 온갖 거짓 왕들을 보여 주는 일련의 장면들 속에 이 만남을 배치했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분의 침묵이 진리를 한층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부류들, 즉 성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대제상들과 서기관들 장로들과,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이들은 서로서로를 견제하는 권력구조에 맞물려 있는 세력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들로부터 십자가에 올라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23:11-12,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회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왜 누가는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을까? 누가의 책 전체는 경계 넘은 땅으로 확장되는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식 유대교를 넘어서, 이스라엘의 인종과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편견과 무지를 넘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청년과 노인, 미움받는 사마리아인과 세리를 하나로 화해시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지 않는 헤롯과 빌라도가 화해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로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사방에서 화해가 물 밑듯이 터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찮은 식민지 군주와 음흉한 총독이 맺은 얄팍한 거래와,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누리는 복음의 풍성한 교제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죽음 덕분에 세상이 새로운 곳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여 주는 온갖 징조에 민감합니다. 그는 우리 역시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누가는 당대의 교회와 우리 시대 교회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십자가 그늘 아래 들어간 당신은 어느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처럼 세상 권세들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친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끼리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권세들은 똘똘 뭉쳐서 대적을 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우리들끼리 서로 싸우고 다투면 누가 좋아할까? 
 이 시간에 생각을 해봅시다.나에게 아직도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