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3. 23:27-43. "십자가 처형"

2022. 1. 19. 21:12누가복음강해

 

 

 이때까지 메시아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유다와 드다(행 5:37)처럼 로마에 의해 처형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힐 정도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려고 했을까? 가야바가 마가복음 14:63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옷을 찢고 "신성모독"이라고 외쳤을까?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여기서 "권능자 우편"은 시편 110:1편 말씀을 인용했고, "구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 7:13, "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가야바가 옷을 찢은 이유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중대한 것이긴 했지만,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신성모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가야바가 그토록 격분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의 성전 행위와 성전 진술들을 메시아직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그 당시 유대교 속에서 몇몇 병행적이고 독립적인 전승들 속에서 메시아 또는 "인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보좌를 공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현현의 중심 특징들 중의 하나가 되는 왕으로의 즉위를 보여주는 두 개의 본문을 결합시켜서 그렇게 설명했기 때문이라고 현재의 신학자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의 교리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끊임없이 이야기하신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종말은 우주적인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뜻은 '그 당시 사상'에서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사상은 무력으로써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해야 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평화의 나라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호전적인 나라를 향해 거듭 예고하셨던 그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과 그 주민들에게 선언했던 화(13:1-5)가 지금 자기에게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가 내릴 심판은 너무 가혹해서, 예언자의 경고대로(호 10:8) 사람들은 제발 땅이 갈라져 자신들을 삼켜 달라고 간청할 것이다(30절). 누가복음 초반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굶주린 자,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내려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여자들을 향해서 머지않아 그들이 아이가 없는 이들, 즉 보통 때 같으면 그런 사실을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을 이들에게, 그와 똑같은 축복을 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8-29). 이 얼마나 섬뜩한 말씀인가~이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들이 자라서 로마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로마가 늘 반역자에게 가했던 운명을 자식들이 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23: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오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른나무' 즉 불태울 나무가 아니셨습니다. 도리어 '푸른 나무'셨습니다. 평화와 회개, 이스라엘과 열방을 화해시키는 하나님 나라가 그분의 사명이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일을 저지른다면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 무차별 폭력과 폭행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선동가들이 예루살렘에 가득할 경우, 그들이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 만약 로마인들이 평화의 왕자를 십자가에 매단다면, 진짜 반군 지도자에게는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란 섬뜩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좌우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을 대조함으로써, 같은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한 사람은 비웃지만, 다른 한 사람은 누가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나 강도, 범죄자에게나 어울리는 처형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결백하신데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십니다.
 누가의 십자가 그림 중심에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권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부적합한 사람들과 어울리셨고, 부적합한 사람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전하셨으며,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부적합한 사람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왕으로 소개되지만, 그것은 조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술잔을 바치는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저 로마 군병이 가난한 백성들이나 마시던 신 포도주를 바치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을 세상에 선언하는 왕의 푯말이 등장하지만, 실상은 그분의 무자비한 죽음을 설명하는 죄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기도와 약속에서 그분의 진정한 왕권이 빛나는데, 누가만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고문하던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죽어 간 전통적 순교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34절). 즉위하러 가는 왕처럼, 예수님은 구하는 이에게 영예와 행복의 처소를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43절). 유대교 사상에서 '낙원'은 반드시 마지막 안식처는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여 새 생명을 받기 전에 누리는 쉼과 회복의 장소입니다. 이 말씀이 죽음 이후의 삶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면 곤란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지금이 '낙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낙원'에 함께 하려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예수님 안에 편안하게 쉼과 회복의 상태로 있지 못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용한 양식을 걱정하게 되고, 자식 걱정, 건강 걱정,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잃어버릴꺼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실까? 바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수천 년 전에 쓰인 성경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우리들의 삶을 바꿀 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을 위해서 늘 기도를 해야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다고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낮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함이 아니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낙원'에 거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 생각해봅시다. 나는 지금 '낙원'에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