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5. 21:28ㆍ누가복음강해
오늘 본문 말씀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묵상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문제와 고뇌를 엠마오 가는 길로 기도하면서 가져가라, 다가오는 낯선 사람에게 그 문제를 기꺼이 나누라, 그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 목소리는 현재 상황에 말씀을 적용하여 설명해 주고, 인도하며,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생을 살면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두 제자의 심정을 느끼는 사건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길 위의 두 사람은 글로바와 마리아 부부였을 것입니다(요 19:25). 이들은 열두 제자들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따라다닌 쵝측근이었을 것입니다.
여자들이 빈 무덤을 목격하고 증언한 날에 그들 중 두 명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13절). '그들'은 9절에 언급된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들'을 가리킵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14절). 이들이 나눈 이야기는 다음절에 나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18-21절). 그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의 생애와 실제 일어난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실망감과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이나 생계의 문제 등으로 예루살렘을 떠났을 것입니다.
24: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누가는 왜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 당시 유대교의 부활 희망에는 몸의 변화를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님의 몸은 변화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똑같이 부활한 생명에 참여해 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풀 수 없는 신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첫눈에 알아볼 수 없었던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로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아마 누가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에서 그분을 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을 알 수 있고 그분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 이상의 인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실 것이라고 희망을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지배에서 단번에 해방되어 평화와 거룩함 가운데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예수님이 이제 죽어서 사라지셨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통렬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출할 분이셨다면, 이방인의 손에 죽지 말고 그들을 쳐부숴야 마땅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매우 혼란 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생계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이들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확신이 크면 클수록 실망도 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4:25-27,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성경에 나온 선지자의 말씀으로 자신에 대하여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구약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다시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난에서 구원하신 긴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난을 거쳐 구원하신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대표자, 메시아가 직접 짊어지실 고난을 거쳐야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관한 내용을 전부 해석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어떤 성취를 이루기 위하여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 성취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이가 이스라엘의 고난을,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의 고난을 직접 짊어지시고 그 무게에 눌려 죽으셨다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시작으로 다시 살아나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이제 일어났다고 예수님은 지금 두 제자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의 관점에서 자꾸 읽고 해석하고 은혜를 받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은 바로 우리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우리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쓰인 것이라는 것을 본문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들의 마음의 상심이 커서 예수님이 옆에 있어도 몰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들의 생각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인생을 살면서 본문 말씀에 나오는 두 제자와 같은 상황에 맞닥들일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들은 어떻게 처신을 했는지를 한 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하셨다는 것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시면서 우리들이 실족을 해도 다시 일으키시고 우리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할 수 있게끔 항상 도우시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다만 우리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을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우리의 삶을 바꿀 때 비로소 우리들은 심장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 시간에 생각해봅시다. 나는 항상 내 곁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를~그래서 나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과 항상 상의를 하고 있는가를~
'누가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8. 24:36-53. "예수의 약속과 승천" (0) | 2022.01.27 |
---|---|
[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7. 24:28-35. "자신을 나타내시다" (1) | 2022.01.26 |
[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5. 24:1-12. "부활" (0) | 2022.01.24 |
[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4. 23:44-56. "예수의 죽음과 매장" (0) | 2022.01.20 |
[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3. 23:27-43. "십자가 처형" (0) | 2022.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