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누가복음강해]#87. 24:28-35. "자신을 나타내시다"

2022. 1. 26. 21:39누가복음강해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로 인류의 비극이 시작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비극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류의 죄의 속박 아래 가두는 진짜 노예의 주인입니다. 지상의 폭군은 죽음에서 힘을 빌려와서 통치권을 확장합니다. 십자가형이 로마 권위의 대표적 상징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에서 승리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권세에게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에 이르자 예수님은 가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서, 그들은 날이 저물어 가고 있으니 자신들과 함께 하자고 권유합니다(28-29).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누가는 예수가 부활 후 첫 식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새로운 창조 세계의 첫 식사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요 표지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엾게도 머지않아 다시 죽음 앞에서 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세계를 통과해서 반대편에 있는 새로운 세계, 죽음이 없는 새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떡을 떼며 축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부활 후 첫 식사를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같이 한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과 하지 않고 글로바 부부와 했을까요? 우리들이 생각하기로는 당연히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과 첫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왜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일까? 이는 누가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이 단순한 식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핵심 상징 행위가 된, 빵을 떼는 행동을 지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현존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사람들은 이 식사를 통해 그분이 자기들과 함께 또 자기들 안에 살아 계심을 발견한다(행 2:42)는 것입니다.
 24:32,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은 세상 너머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 너머를 보는 눈을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눈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성령의 도움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을 어떻게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실까? 바로 말씀입니다. 수 천년 전에 쓰인 성경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알라딘 요술램프처럼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가독교는 뜨거운 심장의 종교입니다. 차가운 이성의 머리로 이해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심장은 차갑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이들은 보통 자신의 우월함을 들어내기를 좋아하고 성경에 말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항상 분란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는 자가  될 수 있는 무리들입니다. 본문 말씀 처럼 말씀이 나에게 뜨겁게 다가올 때 우리의 영안은 열리게 되고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말씀이 나에게 뜨겁게 다가올 수가 있을까? 성경을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식대로 하나님과 세상의 이야기를,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깊이 숙고하는 법을 배울 때,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이 예수님에게서 그 절정에 이르렀음을 깨달을 때에, 별개의 증거 구절이 아닌 이야기의 전체 흐름 가운데 성경이 지시하는 분으로 예수님을 볼 때에 그렇게 말씀은 우리들에게 뜨겁게 다가올 것입니다. 
 24:33-34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있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글로바 일행은 예수님과 식사를 할 때 늦은 오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돌아올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창조의 세계에 들어온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거듭난 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 마음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열한 제자와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도 시몬을 통해 예수님이 무덤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글로바 일행의 마음을 잘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묵상을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과의 어떤 체험을 했는지를~ 그때의 그 심정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지~만약에 아직도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체험을 한 경험은 잊지 말고 항상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아가며 힘들 때면 한 번씩 꺼내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