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6. 15:43ㆍ데살로니가강해/고린도후서강해
앞 본문에서 모세는 자기 얼굴에 너울을 써서, 하나님 곁에 있다가 비록 뒷모습이나마 하나나님을 언뜻 봄으로써 생겨난 찬란한 영광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지 못하게 했던 사건을 이야기 했습니다. 중세에 그려진 모세의 그림을 보면 그의 머리에 작은 뿔이 달려 있는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리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단어가 ‘뿔이나다’‘뿔이 나다’는 뜻의 라틴어 단어와 아주 비슷해서 혼돈해서 모세의 머리에 뿔이 있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가지 않을 때는 너울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을 쳐다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바울이 본문에서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직분, 즉 사도로서 자신의 사역은 그와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그가 일할 때, 모든 사람이 영광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12-13,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바울이 본문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사역과 모세의 사역 차이로 인해, 그는 엄청난 “담대함”을 갖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진짜 ‘메시지’를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활한 말속임으로 메시지를 포장하지 말고, 과감하고 또렷하게 밝혀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직설적이고, 선명하고, 진지한 가르침을 두고 그를 비판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훨씬 더 완곡하고 훨씬 더 세련된 것, 너무 부담이 훨씬 덜한 것을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니다,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3:14-15,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날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본문에서 바울은 모세가 영광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 결과 이제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모세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 곧 절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주장하듯 이, 문제는 모세와 율법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굳은 마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회당에서 낭독될 때 너울이 지금도 율법 자체, ‘옛 언약’ 위에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참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율법에는 “수건이 덮여”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건은 낭독되는 율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마음 위에 덮여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유대 사람’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은 그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아.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희망과 운명을 성취된 분, 그 안에서 하나님이 모든 옛 약속들에 대해 ‘예’라고 말씀하신 분(1:20) 임을(1:20) 깨닫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서 9:1-5과 마찬가지로, 그는 서글픈 마음으로 동료 유대인들을 바라보듯이, 수건이 벗겨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수건은 어떻게 벗겨지는가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논증합니다.
3:16-17,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모세는 성막으로, 즉 주님의 임재 안으로 돌아갈 때 수건을 벗었습니다. 수건이 필요했던 이유는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에는 수건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출애굽기 34:34을 인용하여 “수건이 벗겨지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이 뜻은 ‘회심하다’ 혹은 ‘회개하다’라는 뜻도 될 것입니다. 곧 누군가 주께로 돌아설 때, 그들은 성경의 참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복음을 담대하고 과감하게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의 영”의 역사 때문이며, 주의 영이 계신 곳은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이 출애굽기 본문을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과 맺은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합니다.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본문에서 “주”는 성령, 곧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삶을 변화시키고, 현재에 새 생명을 전달하고 미래에 그것을 보장하는 주권적인 분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21-22). 바울이 회중을 볼 때, 또 회중이 그를 볼 때, 그리고 그들이 서로 바라볼 때. 모두가 영, 주께서 그 마음과 삶에 역사하셔서, 치유하고, 부드럽게 하고,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사람들로 서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주의 얼굴을 응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서 생명을 주시는 영을 응시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장 전체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거울을 보듯이 주의 영광을 응시한다면, 즉 성령에 취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 눈이 부셔 수건을 덮은 대신, 우리는 우리 각자가 모세처럼 더 높은 차원의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 곧 주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얼굴은 대개 모세의 얼굴처럼 빛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전체 논점은, 이 영광은 당신의 믿음을 통해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로 하여금 모세처럼 더 높은 차원의 영광스러운 단계까지 인도하는 것이 사역자들의 임무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역자들이 먼저 모세의 영광의 차원까지 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모세같이 더 높은 차원의 영광의 단계를 경험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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