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4. 15:23ㆍ마가복음강해
오늘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12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자와 이야기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야이로의 딸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5:35-36,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하고 말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믿기만 하라는 말은 너무나 황당스럽기 그지없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회당장은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기다렸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모든 체면이나 위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당장을 실망시켰습니다. 회당장은 지금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딸을 살려 놓고 난 후에 이 여자와 이야기하셔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늦게 오셨고 그동안 아이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즈음 가버나움에서는 희한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났기에, 슬픔과 공포에 마비되었을 야이로도 자기 집에까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정도의 믿음은 발휘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집에서는 장례 절차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5:38-39,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그 당시에도 애도 과정을 시작하는 의식이 잘 갖춰져 있었다고 합니다. 전문적으로 곡하는 사람들이 소래 내어 울며 들어오고, 때로는 피리도 불었을 것입니다(마태는 피리를 언급했다). 그들은 애도하는 가족이 어떤 제한이나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감정을 맘껏 풀어놓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는 죽지 않았다 자고 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고대 사회,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잠을 죽음의 은유로 많이 사용했고, 실제로 예수님도 요한복음 11:11에서처럼 ‘잔다’는 말을 ‘죽었다’는 의미로 가끔 사용하셨습니다. 마가는 어쩌면 독자들이 앞장에 나온 씨와 식물의 이야기를 생각해내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씨앗이 자고 일어나고 했던 것처럼 지금 이 여자아이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란 생각을 말입니다. 이 사건은 어느 젊은 예언자를 통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표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무리는 뒤에 남고, 여섯 사람만이 죽은 여자 아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40절).
5:41-42,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예수님은 여자 아이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아람어로 기록된 몇 안 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본문은 많은 질문을 유발시킵니다. 우선 왜 마가는 아람어를 그대로 기록했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헬라어를 말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일상에서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일상에서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가 특별히 아람어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합당한 해석은 이 단어가 베드로를 비롯한 일행에게 너무도 깊은 인상을 남겨서, 그들이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 단어만큼은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수리수리마수리”같은 마법 주문이 아니라. 잠자는 아이를 깨울 때 쓰는 일상 단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이야기의 요점이자 이 본문의 요점은 바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생의 평범한 일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왜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1-17), 나사로(요 11:1-44)만 살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누가 죽어서 그 가족들이 슬퍼하며 도와 달라고 예수님이나 제자들을 찾아오는 경우가 분명 많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구약성경이나 비유대교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공평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한두 번 하신 일이라면 왜 모든 사람을 살리시지 않는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을 거절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만 특별 사례로 취급하시는가?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다면, 왜 우리 시대에는 홀로코스트 같은 끔찍한 일을 막지 않으신단 말인가?
하지만 이 질문은 마가가 들려주는 더 큰 이야기의 요점을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통적 의미의 혁명에서처럼 1인 주도의 해방 운동을 하시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1인 응급 의료 센터 역할도 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혁명을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보여 주셨지만, 그분의 목적은 더 근본적인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하실 진짜 혁명, 진짜 치유의 징조일 뿐이었습니다. 이정표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곧 목적지는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마가복음을 계속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죽음에 대해 이런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 앞장서며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헤롯이 알면 심기가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누가 공식 경로를 벗어나 이런 식으로 행동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알면 기를 쓰고 막으려 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정치를 포함한 모든 측면에서 보아야만 마가가 반복해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악의 핵심과 맞서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에 직접 맞서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것을 패배시키실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신 분이란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죽음의 권세를 벗어난 그리스도인처럼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가복음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22. 6:7-13.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다" (0) | 2023.07.18 |
---|---|
[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21. 6:1-6.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다" (0) | 2023.07.17 |
[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19. 5:21-34. "야이로의 딸과 만성 혈루증 여인" (1) | 2023.07.13 |
[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18. 5:1-20.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 (0) | 2023.07.12 |
[읽기 쉬운 마가복음강해]#17. 4:35-41. "폭풍을 잠잠케 하시다" (0) | 2023.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