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5. 11:17ㆍ사도행전강해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주고받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을 주고받았다’고 하지만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칼을 서로 주고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격렬한 말을 주고받은 것입니다.
23:1-2,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은 공회원들에게 자신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는 한 번도 잘못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잘못을 할 때마다 곧바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너는 불경스러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너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할 권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 명령을 내린 사람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유대교의 율법을 잘 알기에 곧바로 대꾸합니다.
23:3,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은 심판받는 자가 아니라 심판석에 앉은 자처럼 아나니아의 말과 행동을 심하게 비난합니다. “회칠한 담”은 넘어질 것 같아 약한 벽을 일시적으로 회를 두껍게 발라 감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13:8-16에서 이 본문의 요점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짓 약속을 하며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하는 예언자들을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은 율법에 따라 나를 판단해야 하는데, 나를 치라고 명령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당신이 나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아야 하는 율법을 오히려 가로막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기 전에는 범죄자로 취급해서는 안 되게 되었으므로 아나니아는 실제로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3:4-5,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이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을 직접 본 적이 족히 20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줄 몰랐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유대교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모욕했다는 지적을 받고 아나니아가 누구인 줄 알게 되자 바울은 재빨리 사과를 합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는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출애굽 22: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를 인용하면서 사과를 합니다. 바울이 존경하는 것은 그 직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직위 자체를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얼마 전에 고린도에서 집필한 로마서 13:1-7의 요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평화와 정의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통치받기 원하십니다. 만약에 정의의 구조가 없다면 폭력배나 착취자 같은 사람들이 언제나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구조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현재 그 구조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상기시켜 주는 의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정치 신학입니다.
바울은 공회원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일부는 바리새인인줄 알고 미묘한 문제를 거드립니다. 23:6,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이 재판은 부활에 관한 것이라고 바울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폭탄을 던진 것입니다.
23:7-8,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정도까지는 수용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동조할 분위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한 마디에 법정의 분위기가 반전이 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사람들의 생명을 어떤 형태로 보존하신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천사’ 같은 존재라고 하거나 누군가의 ‘영’이 아직 살아서 부활을 기다린다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람의 ‘천사’ 혹은 ‘영’ 일 것이라는 데까지는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23: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이로써 바리새인 편에서 몇 율법학자들이 일어나 바울 편을 들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25년 전 사도들이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가말리엘 이 변호한 말을 기억나게 합니다(5:34-39). 이에 천 부장은 바울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마치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아기처럼 두 쪽으로 찢길까 걱정이 되어 그들 다시 병영 안으로 들여보냅니다(10절).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바울이 주님이 곁에 있다고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고 로마로 갈 것이라는 확신하게 된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편안한 여정은 약속받지 못했지만 로마에 갈 것이며 그곳에서도 여기서처럼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증인’이란 말에서 ‘순교자’라는 말이 파생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지금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것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참 즐겨 사용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증인’이라는 말이 ‘순교자’의 어원이라는 것을 알면 이 말을 사용하기가 좀 꺼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교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또 순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증인’이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곁에 주님이 거하시는 것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하며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내어야 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훈련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영성훈련은 어떠한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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