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사도행전강해]#91. 28:23-31. "마지막 을 마치며"

2022. 11. 11. 13:51사도행전강해

드디어 사도행전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한 대로, 드디어 바울이 “땅 끝”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도착한 그 땅 끝에는 이미 예수의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편견과 의혹의 대상으로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기를 갈망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성취되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28: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바울은 그가 머물고 있던 셋집에서 어느 정도 자유는 허락이 되었지만 여전히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서 왔던 지도자들(17절)은 좋은 동기든, 나쁜 동기든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바울의 말을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전했던 이야기는 누가가 본문에서 많이 이야기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시편과 예언서와 모세와 아브라함의 위대한 이야기에 여러 가지 작은 이야기를 붙여 뒷받침하고, 그 모든 이야기로 고난 받으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했던 메시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조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온 세상의 주로서 자신의 왕권을 주장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황제는 가짜 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이 세상의 참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의 반응은 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였던 것입니다.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결국 로마에서도 유대인이 둘로 나누어지는 슬픈 사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에서 이방인이 구원받은 후에야 시기가 나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롬 9-11장)에서 말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합니다.

 28:26-28,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이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본문은 사복음서에도 인용되어 있는 구절이고,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언급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특이한 목적에는, 그 목적을 수행하지 위해 한 민족의 부름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민족들은 자기들의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소명이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하나님에게 열심이었던 바울을 이방인 전도에 목숨을 걸게 했던 것입니다. 아니 바울은 원래부터 하나님에게 열심이었습니다. 다만 그 길을 수정했을 뿐이었습니다.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바울은 2년 동안 그 셋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하면서 누가는 사도행전을 마무리합니다. 누가는 그 후 사건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것, 무죄 선고와 정당성을 인정받은 이야기를 서술했는데 바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끔찍한 반전일 수도 있고 또는 바울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대칭이 된다는 생각을 암시하는 것 초자도 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바울이 네로 앞에서 무죄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누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사실을 이 책의 최후의 절정으로 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왜 사도행전을 썼을까? 아마도 누가는 바울이 직접 황제 앞에 섰을 때를 대비해서 이 책을 썼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로마 관리들이 처음에는 바울에게 적대적이지만 결국에는 사과하고, 그가 로마 시민이며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과, 소송을 기각하고, 폭동을 평정하고, 위험에서 그를 구출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책을 로마 황제가 읽는다면 바울의 재판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러나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당연히, 시작 부분에서는 이 세상의 주로서 왕위에 오르셨고, 결말 부분에서는 ‘공개적으로 방해받지 않고 담대하게’ 선포되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지금도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통치자. 장애인, 현지 당국, 섬의 총독, 떠돌이 천막장이 장터의 철학자, 창틀에서 꾸벅꾸벅 조는 청년들과 마주치는 나사렛 예수, 누가는 그 예수님을 지금 우리들 앞에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그는 눈부신 글과 신학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며, 우리 자신도 이 드라마에 등장인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 여행은 우리의 여행이고, 그 재판과 무죄 판결도 우리의 것이고, 주권적인 예수님의 임재도 우리의 것이며, 그 이야기도 우리가 이어 가야 할 우리의 것입니다. 누가의 글은 바울의 여행처럼 종착지에 도달했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전승인 것입니다. 이 사도전승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