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에베소서강해]#7. 2:11-16. "막힌 담을 허시고"

2024. 2. 8. 11:26에베소서강해

 

오늘 본문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새로운 사람, 즉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것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기이한 점은 아주 크고 넓은 강이라 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훨씬 작은 강과 합류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두 지류가 합쳐져서 흐르는 그 강은 더 작은 강의 이름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크고 넓은 강은 전 세계적인 이방인 연대, 온 세계로 뻗어 나간 비유대 민족들,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고대 그리스, 로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을 비롯한 온갖 영화를 누렸던 여러 국가를 가리킵니다. 작은 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단일 가계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구상하신 이상한 지도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메시아 예수라는 합류 지점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이 그 길을 따라 계속 흐르듯이, 이 공동체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 얻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족장들과 맺으신 약속의 언약에서 비롯되는 희망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이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2:11-1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라”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그들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조하셨고 뱀이나 이방인을 죽이는 것은 똑같이 좋은 일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오직 자신들만을 사랑하신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고 그들에게, 그들을 통해 복을 약속하셨는데(롬 9:4), 여기에서 특히 약속은 구세주를 세상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며 언약은 메시아의 오심을 약속한 것을 포함한 모든 계약, 즉 아브라함(창 15:7-21), 야곱(창 28:13-15), 이스라엘(출 24:1-8), 다윗(삼하 7장)과의 계약 등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에 대해 이방인들은 “외인”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를 언약 백성의 결정적 표지라 여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할례도 인간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는 유대 저자들이 이교도 우상들을 가리킬 때 쓰던 표현입니다. 이에 바울은 높은 기준을 주장합니다. 메시아께 속한 이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리심으로써(히 10:19-22),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참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에서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평화를 이루시거나 가져다주시는 자 라는 뜻이 아니라, 그 자신이 우리 죄의 구속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가 곧 우리의 평화가 되신다는 것입니다(사 9:6, 미 5:5). 또한 본문에서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소와 이방인들의 뜰 사이를 가로막은 돌기둥이나 난간을 의미할 수 있고, 또는 랍비들이 말하는 울타리나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적개심, 원수, 적대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2:15-16,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로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율법을 폐하셨으며(롬 7:4, 갈 3:13),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은 율법이라는 장벽은 무너지고 율법에 의해 지배받던 옛 질서가 폐하여졌으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롬 7:6)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골 2:14) 이방인들은 힘쓰지 않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담이 쌓여 있어서 서로 적개심을 가지고 원수시하였습니다. 이처럼 1세기에는 유대 율법이 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데 이용되었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담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두 그룹 사이에 있던 적개심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심으로써 적개심의 담이 무너지고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로 연합하여 평화를 이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통합 문제에 직면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그것이 중요한 문제인 지역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맞닥뜨린 아주 긴급한 문제는 바울이 무엇보다도 먼저 제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교회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인종이나 문화적 계통에 따라 분열되어 있다면, 바울은 우리의 복음에,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똑바로 이해한다면 교회와 교인들은 정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과연 십자가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