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쉬운 마태복음강해] #2. 1:18-25 "예수님의 탄생"

2022. 5. 24. 16:36마태복음강해

 

우리는 우선 마태복음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Q복음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으니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 동안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비웃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 사고를 친 것이 아니냐는 암시를 8:41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쓴 누가와 마태는 당시 떠돌던 그러한 소문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요셉의 시선으로 본 것이고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시선으로 본 것입니다. 두 이야기가 서로 일치시키는 것은 없지만 핵심 사실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이 하나님의 메시아를 낳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흥분에 빠진 갈릴리의 처녀를 보여 주는 반면, 마태는 자신의 약혼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좀 더 차분한 요셉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이야기가 서로 비슷해지는 유일한 지점은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했듯이 천사가 요셉에게 “무서워 마라”라고 말하는 부분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된 것이 나타났더니”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남녀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법적인 결혼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혼입니다.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실제로는 부부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어렸을 때 정혼을 하기 때문에 생활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혼한 사람이 부부 생활을 하려면 남자가 돈을 벌어 와서 신부 대금을 지불하고 아내를 데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관계도 맺지도 않았는데 약혼자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안 요셉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 소문이 알려지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19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여러 세기 전부터, 기독교를 반대하던 많은 사람은 물론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 이야기를 당황스럽고 불필요한 것이며 심지어는 사실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이야기들이 예기치 못한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성은 더럽고, 하나님은 성과 관련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는 전설을 만들어 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독신으로 사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낫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태나 누가를 탓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이야기, 그리고 왜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셨는지를 궁극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믿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뿐입니다. 또한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고대 이방 세계에는 인간 아버지 없이 신의 간섭을 통해 잉태된 영웅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모든 점에서 매우 유대교적인 관점을 가졌던 마태가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그러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모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주의 사자가 마태에게 꿈에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데려오기를 무서워히지 마라고 합니다(20절).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1:21-22,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마태는 이름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셨고 누구신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내용을 알려 주려 합니다. ‘예수’는 당시에 흔한 남자아이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끈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모세 율법이 가리키긴 했지만 그 율법만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것을 이제 완성하실 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가 아니라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출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삶 속에서 겪었던 ‘유배’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실 것이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예수라는 이름과 달리 이사야서 7:14에서 언급하고 있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이 이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예수라는 이 아이가 앞으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전체가 이 주제를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맨 끝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자신이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28:20).

 이처럼 하나님은 멀리서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적극적으로 움직이시며 때로는 가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동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행동하시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하십니다. 결국은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다는 것을, 혹은 그렇게 행동하시리라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인 것입니다. ‘믿음’ 자체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단지 구원의 통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한다는 것은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은 성경 말씀을 믿는 것에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며 강력한 사랑과 은혜로 새롭고도 놀라운 활로를 제시해 주시는 분이 바로 이 하나님이고 이 예수님이란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 시간 나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는가를 한 번 점검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